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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소서! – 2025년 10월 26일

사무엘상 8장 1-22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이 세상은 결코 줄 수 없는, 그리고 이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안의 복을 날마다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주일 “그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라.”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불의, 체제, 상식을 넘어 사랑과 정의의 길을 택한 전태일 열사의 삶이 “무엇이든지 다 듣는” 거룩한 삶이고, 본이 되는 삶이 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과 말씀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오늘 나는 누구를 섬겼고, 누구의 말을 듣고 있고, 무엇을 증명하며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와 내 집은 주님만을 섬기겠습니다!’라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 삶으로 고백을 증명할 수 있는 성도,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문에 붙인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부패한 당시 가톨릭교회의 권력과 돈, 형식의 신앙이 불의한 일임을 선포했습니다.

이러한 죽음을 감수한 활동으로 루터는 1521년 4월18일,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할 기회가 왔습니다. 1521년 봄 제국회의 출석을 요구받은 마르틴 루터가 만류하는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겠다. 설령 보롬스 시내 지붕의 기와가 모두 적이 되어 습격해 오더라도 나는 간다.’

루터 자신도 그 어떤 때보다 이번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면벌부(免罰符·면죄부)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반박한 ‘95개조 논제’를 발표한 지 만 3년 반. 루터는 압박과 수없는 살해 위협에도 굳건히 신념을 지켜왔고, 기회가 생겼습니다.

유력 제후들과 고위직 사제들이 즐비한 청문회장에서 루터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성서의 말씀과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해왔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 양심에 따라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양심에 벗어난 결정은 안전하지도, 현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터는 “하나님,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종교 재판과 소환을 거부한 적도 있고, 교황의 권위에 대한 열띤 토론(라이프치히 논쟁)에서는 이런 주장도 펼쳤습니다. “성서가 없는 교황과 공의회보다는 성서를 지닌 평신도를 믿어야 한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과정을 통해 지금의 개신교는 가톨릭에서 나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은 단지 교회가 분열된 날이 아닙니다. 교황이 하나님을 대신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불의. 즉, 인간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고자 하는 잘못된 길에서 하나님만이 왕이 되실 수 있다는 고백이자, 하나님을 왕으로 다시 모시겠다는 결단이 바로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바로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 되실 수 있음을 드러내는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교개혁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만이 왕이시다’라는 정신은 사무엘의 시대에도 주어졌던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오늘 본문 속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5 그들이 사무엘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른께서는 늙으셨고, 아드님들은 어른께서 걸어오신 그 길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이라는 이 말, 겉으로 보기엔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요구 같지만, 이 요구에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기는 불안합니다. 눈에 보이는 왕, 제도, 권력, 군대가 필요합니다.”

이런 요구가 바로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신앙의 위기이자, 끊임없이 성도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유혹입니다. ‘남들처럼 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원한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사무엘이 늙었고, 그의 아들들이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한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게 된 문제는 사무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상실, 불안과 두려움에 굴복한 마음이 근본 문제였습니다. 인간은 늘 불안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체제, 제도, 사람을 더 신뢰하고 싶어 합니다.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사실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기 이전인 사사시대는 인간적인 눈으로 보자면 너무나 위태롭고 불안한 사회였습니다. 하나님이 사사를 통해 대리 통치하셨고, 평시에는 지파 연합의 느슨한 연대를 유지하였고, 위기 시에만 하나님의 영을 받아 임시적으로 등장하는 군사 지도자 및 구원자가 있었을 뿐입니다.

중앙 정부는 당연히 없었고, 상비군도 부재한 상황이었습니다. 사사기 21:25을 보면,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라고 기록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사사시대는 무질서해 보이고, 불안해 보이기만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시대를 보내고, 사사 시대를 보내며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키고, 인도하심을 경험했음에도. 안전과 평화를 위해 중요한 건 그런 왕, 힘과 군대, 정치력, 지식, 지혜가 아니라고 언제나 말씀하시고 경험하게 했음에도. 왕을 요구했다는 점입니다.

믿음 없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만 무질서하고, 불완전할 뿐. 가장 안전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질서 속에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왕을 달라고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체험하면서도.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도 늘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는 까닭입니다.

이 시대의 왕은 더 이상 다윗이나 사울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 왕은 돈, 성공, 명성, 조직의 힘, 숫자의 논리로 변형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끊임없이 “남들과 같아지려는 욕망” 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큰 교회, 더 화려한 예배, 더 세련된 시스템, 더 영향력 있는 교단과 네트워크 등등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를 성숙, 성장하게 만든다고 착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런 신뢰의 회복, 다시 하나님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오늘 우리의 종교개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은 하나님 대신 다른 왕을 세우려는 시도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1,500년 뒤 루터의 시대에도, 교회는 다시 하나님 대신 사람의 권위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1517년의 루터는 이런 유혹과 싸웠던 사람이었습니다. 루터는 교황과 제국의 권위가 신앙 위에 군림하던 시대에 “오직 말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외쳤습니다.

이 고백은 단순히 신학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불안을 이기고, ‘남들과 같아지려는 유혹과 욕망’을 거슬러 선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신학자들이, 다른 교회들이, 다른 권력자들이 이미 타협했지만, 루터는 남들과 같아지려는 유혹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루터의 개혁은 교회를 더 세련되게 만드는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이 일으킨 바람은 하나님만을 왕으로 세우는 신앙의 회복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개혁을 “분열의 사건”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간 사건”으로, “다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사건”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며칠 전 저는 강원도 홍천에 있는 남궁 억 장로님의 기념관을 방문했습니다. 우리 찬송가 580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작사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신앙으로 민족의 정신을 일깨운 행동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교육자이자 언론인이었고, 동시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보급하며 나라의 영혼이 꺼지지 않도록 믿음으로 민족의 혼을 지켰습니다.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사랑’을 위한 실천이었습니다.

남궁 억 장로의 개혁은 루터의 개혁과 닮았습니다. 그는 남들과 같아지려는 길을 거부했습니다. 일제의 권력 앞에서 편의와 안락을 택하지 않고, 진리와 민족의 존엄을 선택했습니다. 사람과 제국이 인간 위에 군림하거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만이 주인 되시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던졌습니다.

루터는 제국과 교황의 권력 앞에서도 하나님만이 왕이심을 외쳤습니다. 남궁 억 장로는 제국주의의 억압 앞에서 신앙으로 민족의 혼을 지켰습니다. 그들의 개혁은 ‘세련된 교회’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왕으로 세운 신앙의 회복이었습니다.

오늘 나 자신과 우리 교회는 어떤 ‘왕’을 세우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다른 교회처럼 되어야 한다.”, “이 시대에 뒤처지면 안 된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정말 나를 왕으로 믿느냐?”

교회는 언제나 시대 속에서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개혁이 편리함을 위한 개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복음의 본질을 위한 개혁, 남들과 같아지지 않기 위한 개혁이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잃어버린 개혁 정신은 “세상과 같아지지 않기 위해 싸우는 용기”입니다. 사무엘 시대 이스라엘의 문제는 ‘왕이 없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도 같습니다. 건물은 크고, 행사는 화려하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다른 바벨탑일 뿐입니다.

루터는 목숨을 걸고 제국과 맞섰습니다. 남궁 억 장로는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불편함을 감수한 사람들입니다. 참된 개혁은 늘 불편합니다. 세상과 다른 길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불편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개혁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시 개혁되어야 할 것은 마음의 태도입니다. 남들과 같아지려는 불안, 자신의 편의를 위한 변명, 숫자와 성과에 대한 집착— 그것이 오늘 우리가 세운 ‘왕’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개혁은 이미 멈춘 것입니다.

개혁은 내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교회를 바꾸려 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내 안에 다른 왕—자존심, 불안, 세상의 기준—을 모시고 있지는 않은가?

개혁은 ‘다름’을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남들과 같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교회가 세상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성도가 세상처럼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이웃에게 사랑으로 다가간다면 그것이 가장 위대한 개혁입니다.

개혁은 먼 옛날의 사건이 아닙니다. 매 순간 우리의 마음에서 다시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불안이 다스릴 것인가, 하나님이 다스릴 것인가? 세상처럼 될 것인가, 하나님께 돌아갈 것인가?

오늘 종교개혁주일에 우리의 신앙과 교회가 다시 이 고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다스리시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교회를 새롭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