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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 2026년 07월 12일

이사야서 65장 17-25절, 요한계시록 21장 1-7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지난 한 주간 나누어드린 ‘기도 묵주’를 통해 기도해 보셨습니까? 주기도문도 묵상해 보셨습니까? 어떠셨습니까? 기도하는 성도와 기도하지 않는 성도의 삶 차이는 너무나 큽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바쁘다는 핑계와 이런저런 핑계를 대기는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도해서 뭐 하나?”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기도, 주기도문은 삶을 달라지게 합니다. 기도, 주기도문은 나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다르게 바라보게 하고, 판단하게 하고, 이해하게 하고 그래서 이전과는 다르게 경험하게 합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평안을 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이미 주어진 참 평안을 적극적으로 누리십시오. 이 평안이 저와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도 주어진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믿음의 방향을 점검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삶과 마음을 돌이키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또한 소망합니다.

오늘 첫 번째 본문인 이사야 65장의 17절 말씀입니다.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상중아, 누구야, 내가 너의 이전 삶을 잘 안다. 고통과 고난 가운데 살았던 삶. 상처받고 차별받았던 너의 삶. 존엄과 노동이 존중받지 못했던 너의 삶을. 내가 잘 안다. 그러나 이제는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65:17의 말씀이 더 놀랍게 다가오는 이유는, 하나님이 단순히 ‘너희들의 삶을 바꾸어줄게.’라고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억으로부터, 마음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을 맞는다고 해서 ‘이전 것들이 기억나지 않거나, 마음에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과거의 기억, 상처는 상황이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런 오랜 억울함의 기억과 상처는 계속해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기억되지 않고,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체 지난 과거의 아픈 일들이 기억되지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말합니다. 이런 기억과 상처가 기억되거나, 떠오르지 않을 만큼의 ‘압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압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본문에 나오는 ‘창조’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히브리어로 이 창조는 ‘바라(Bara, בָּרָא)’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이 창조라는 동사의 주어는 예외 없이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이 ‘창조’라는 단어는 가장 앞선 창세기 1장 1절에 처음 나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세상을 만드실 때 사용된 단어이자, 무에서 유를 낼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이제 바벨론 포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 절망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쓰이고 있습니다.

사람은 기존에 있던 재료들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창조(바라)’할 수는 없습니다. 이 ‘창조(바라)’는 낡은 것을 조금 보수하거나 고장 난 기계를 고치는 ‘수리’의 개념이 아닙니다.

이사야가 전하는 ‘창조’는 이전에는 존재한 적 없던, 인간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감히 예측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질서를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는 ‘압도적인 은혜’의 선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본문에는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시는 삶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다. 백 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길 것이다.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다.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낳은 자식은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기록과는 달리 사실 우리의 상상력은 빈약해서, 또는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져서 이런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미래를 상상하지 못합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삶의 반대가 되는 미래입니다. 그렇기에 더욱이나, 너무나 익숙해진 오랜 포로 생활로 인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기도 했습니다. 너무나 오래 어떤 특정한 상황을 겪다 보면,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이 놀라운 삶의 비전은 25절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이 말씀대로라면, 현대 사회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약육강식’이라는 세상의 가치가 완전히 무너진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십니다. 억압과 차별 속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탐하던 불의한 세상에 하나님의 놀라운 평화가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경이로운 세상을 대체 누가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훌륭한 정치인이나 거대한 혁명으로 가능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겠다고, 이 무질서한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을 보면, 번역자들이 이 히브리어 ‘창조(바라)’를 이사야 65장 18절에서 하나님이 “내가 예루살렘을 창조하며”라고 하실 때 창조를 ‘포이에오’ποιέω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다, 실행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멀리서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라, 불의한 역사 한가운데로 직접 들어오셔서 팔을 걷어붙이고 역동적으로 일하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말합니다. 참된 평화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참된 평화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라고, 우리의 능력과 힘과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시며 하나님이 친히 역동적으로, 적극적으로 행동(포이에오)하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예언하고 기다렸던 이 ‘새 창조’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에서 이어집니다. 21장 1-2절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표현하기 위해 요한계시록에서 저자 요한은 이전의 하늘과 땅, 바다가 사라졌다고 표현했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기록했습니다. 달리 이 이상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 땅에서 사람이 만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압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이처럼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 5절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도 요한을 통해서도 ‘완전히 달라지게 하겠다.’, ‘너희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삶으로 인도하겠다.’라고 계속해서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망과 눈물로 얼룩진 이 세상을 폐기하고 우리를 다른 곳으로 피난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부조리한 땅에서, 현실 자체를 질적으로 완전히 변혁시켜 영광스러운 상태로 회복하시겠다고 그렇게 창조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새 예루살렘은 사람의 진보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진보적인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자크 엘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은 인간이 진보로 도달하는 그 끝에 있지 않으며, 인간의 공적으로 쌓아 올린 역사의 끝에 있지도 않다. 그 끝에서 발견된 것은 늘 바벨론이었다. 우리가 직접 나서서 길을 닦거나 진보의 결실을 하나씩 쌓아 올린다고하여 천상의 예루살렘을 준비할 수는 없다.”라고 말입니다.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습니까? 사람은 늘 욕망으로 가득 찬 바벨론만을 만들었습니다. 이 만듦은 불완전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새롭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성도는 손을 놓고 마냥 기다리면 됩니까? 어차피 나와 우리가 이루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와 회복의 은혜는 누가 누리게 됩니까? 요한계시록 21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쓰일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 제국의 폭력과 차별 아래 있었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박해받았기에 세상의 눈에는 불의한 제국 로마가 승리하는 것 같았고, 성도와 교회는 철저히 패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이기는 자’는 칼과 창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기다’는 선혈이 낭자한 전투에서 승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여지는 패배와 핍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충성된 증인으로 남는 것이 바로 ‘이기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길은 제국의 길, 바벨론의 길과 다릅니다. 오히려 제국의 길, 바벨론의 길에 대항하게 됩니다. ‘이기는 자’는 누군가를 짓밟고 일어서는 방식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의 방식인 ‘정의, 평화, 생명‘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실천하는 사람들,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8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신실하지 못한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오늘 우리는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이기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비겁한 자들입니까? 우리는 이기는 사람들이겠습니까? 아니면 신실하지 못한 가증한 자들이겠습니까?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손해 보지 않으려고 타협하는 비겁한 자의 자리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방향과 다른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다 보면, 성도는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것처럼 무력감이 밀려올 때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한계를 짓고, ‘내가 해봐야 무엇이 변하겠나’, ‘저 거대한 시스템을 이길 수 있겠나’ 하며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누가복음 13장 24절의 말씀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호통과도 같습니다. 함께 읽지는 않았지만 준비한 세 번째 본문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여기서 ‘힘써라’는 투기장에서 생사를 걸고 싸우듯 치열하게 투쟁하라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이기는 자’는 누가복음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성도가 걸어가야 할 좁은 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에게 이익이 되고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 억압받고 소외된 이웃의 곁으로 다가가는 자리입니다. 부조리한 세상의 질서 속에서 애통해하는 이들의 짐을 함께 나누어지는 연대의 자리가 바로 우리가 힘써 들어가야 할 좁은 문입니다.

결과는 우리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앞서 거듭 말씀드렸듯 인간의 힘으로는 이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온전히 창조(바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는 오직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무력해 보이는 현실 속에서도 치열하게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 29-30절은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지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조금 불편하기도 합니다.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얼마 전 성도님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미리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신랑이 왔을 때 잔치 자리에 들어갔지만,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들어가지 못했는데. 서로 기름을 나누어서 등불을 켜고 함께 잔치 자리에 참여하면 좋지 않았겠냐. 예수님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문을 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너무 하신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때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십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오늘 바로 여기서 제자들이 깨닫기를 원하셨던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깨달음의 때가 온다고도 하셨지만, 지금 깨닫게 된다면 또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상의 눈으로는 이 좁은 문을 걷는 성도들의 삶이 가장 미련해 보이고 실패한 ‘나중 된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개입하시는 새 창조의 날에,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약자들의 곁을 지키며 믿음의 길을 걸어간 성도들이야말로 가장 ‘먼저 된 사람’,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을 ‘이기는 자’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종종 무력감을 주는 거대한 현실 앞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위대한 창조를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불의한 역사 한가운데서 빚어내고 계십니다. 늘 우리의 기대, 속도, 바람이 있어서 판단할 뿐.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결과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성도는 다만 오늘 하루, 내게 허락된 삶의 자리에서 끝까지 이기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사람의 일에 매여 편안함과 타협을 좇는 넓은 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며 생명을 살리는 좁은 문으로 담대히 걸어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충성된 증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성도님들의 삶을 통해, 우리의 헛되지 않은 수고 위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뛰노는 하나님의 새 창조가 온전히 드러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