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이제, 나의 이름을 알려주겠다. – 2026년 02월 15일
출애굽기 6장 2-8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성도의 평안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평안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언제나 나에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평안은 삶의 상황이 안정되어 있을 때 누리는 마음 상태가 아닙니다. 성도의 평안은 삶의 상황이 불안정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과 하나님이 나의 삶을 이끌어 가고 계심을 믿음으로서 누릴 수 있는 마음 상태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평안을 어떻게 다시 누릴 수 있을까요? 성령님과 함께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용의만 내면 됩니다.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큰 선물인 평안을 날마다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한신대학교 김희선 교수님을 통해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즐겁고도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사람의 한 면만을 보지 않고, 다양한 면을 바라보며 더 많이 이해하고, 폭 넓게 사랑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선 사람의 다양한 면을 알고 싶어 해야 하고,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다양한 면을 알게 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식적으로는 새로운 사실에 그 짧은 순간 즐거울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과연 한 주간 우리는 얼마나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지식적인 유희로만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성도가 되지 않고, 말씀을 깨달은 만큼 살아내는 진실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설 명절을 맞아, 우리는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면면을 다 안다고 여기는 익숙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 출애굽기의 말씀을 통해 안다고 여겼던 이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하고,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어가는 성도가 되어야 함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렇게 믿음의 세 조상에게는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났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전능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삶, 이삭의 삶, 야곱의 삶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아니었다면 분명 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이들은 생존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 되셔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뒤에 놀라운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들에게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나님’의 모습으로 등장하시기는 했지만,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맺어 오셨음에도,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으셨을까요? 사람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몰랐을까요? 창세기 22:14a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창세기 27:27 “야곱이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삭이 야곱의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서, 그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나의 아들에게서 나는 냄새는 주님께 복 받은 밭의 냄새로구나.”
창세기 28:16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그리고 가장 먼저는 무려 창세기 4:26에서도 “셋도 아들을 얻고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어 불렀다. 그 때 에노스가 비로소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였다.”
창세기 22장, 27장, 28장 그리고 4장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쓰인 야훼는 오늘 출애굽기 6장 3절에 나오는 ‘여호와’와 히브리어 단어가 동일합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이미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라는 말씀은 거짓말처럼 들립니다. 오늘 우리는 출애굽기 6장 3절에 나오는 이 하나님의 거짓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래서 “2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다. 3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는 나타났으나, 그들에게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의 구절에서 우리는 ‘알리지 않았다.’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알리지 않았다’에서 알리다는 히브리어 단어 ‘야다’에서 왔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안다’라는 뜻의 동사 야다는 우리가 아는 ‘안다’와는 의미가 다르게 사용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에서 ‘~을 안다.’라고 할 때에 안다는 ‘외워서, 기억해서 내가 안다.’라는 머리로 정보를 아는 지식이 아니라, 관계와 경험을 통한 깊은 체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관계와 경험을 통한 깊은 체득을 의미하는 ‘안다’라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는 나타났으나, 그들에게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라는 말씀은 거짓이 아니게 됩니다.
‘내가 그들에게 (나의 본래 모습 그대로) 알려지게 되지 않은 그 이름, 이제 나의 그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려주겠다.’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앞으로 너희들과 함께, 너희들의 곁에서, 너희들의 안에서 관계 맺고, 함께 생활하며 나의 하나님 됨, 주, 여호와 됨을 알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유명한 유투버인 백앤아, 웃소, 싸모스, 밍, 김켈리 등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유튜버를 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우리가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와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듯,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가문 내력’ 같은 이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 됨을 경험하게 될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있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4 나는 또한, 그들이 한동안 나그네로 몸붙여 살던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을 세웠는데, 5 이제 나는 이집트 사람이 종으로 부리는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소리를 듣고, 내가 세운 언약을 생각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고통의 소리를 듣고,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약속하셨던 일들을 기억하셨습니다.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들이 생각 나셨습니다.
6-8절의 말씀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6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나는 주다. 나는 이집트 사람들이 너희를 강제로 부리지 못하게 거기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그 종살이에서 너희를 건지고, 나의 팔을 펴서 큰 심판을 내리면서, 너희를 구하여 내겠다. 7 그래서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곧 너희를 이집트 사람의 강제노동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너희를 데리고 가서,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너희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 나는 주다.'””
하나님이 랩을 하듯이 속사포로 쏟아내고 계십니다. “1. 빼내고! 2. 건지고! 3. 구하고! 4. 삼고! 5. 되고! 6. 인도하고! 7. 주겠다!” ‘너희를 이집트에서 빼내며, 건지며, 구하며, 너희를 나의 자녀로 삼으며,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그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며, 그 땅이 너희의 소유가 되게하겠다.’
이렇게, 지금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나의 백성들과 내가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너희를 데리고 가서,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너희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 나는 주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 곁에 계셨고 이름도 알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의 깊은 고난과 구원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은 적은 없었습니다. 이름은 알았으나, 그 이름의 주인공을 진짜로 겪어보지는 못한 상태, 즉 ‘아직 온전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알고 있고, 사실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 맺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래전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라고 배웠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 멀리 떨어진 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앎과는 다르게 오히려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우리와 전혀 상관없이 계신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전혀 믿지 않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이 먼저 우리와 관계 맺기를 원하셔서 다가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바로 뒤에 나오는 9절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와 같이 전하였으나, 그들은 무거운 노동에 지치고 기가 죽어서, 모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감격스럽고 놀라운 비전을 제시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이 인간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고통은 사람을 둔하게 만듭니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벅찬 사람에게는 약속이 희망이 아니라 부담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약속을 들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들이 “무거운 노동에 지치고 기가 죽어서” 듣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숨이 막힐 듯 답답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숨이 가쁜 사람은 긴 설명을 들을 수 없습니다. 호흡이 무너진 사람은 비전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이 듣지 않았는데도, 그들이 환호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이 감사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은 말씀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무감각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믿지 않느냐?”라고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행동하셨습니다. “나는 주다.”, “내가 빼내겠다.”, “내가 건지겠다.”, “내가 구하겠다.” 무감각을 뚫고 오시는 하나님. 듣지 못하는 귀를 억지로 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사건으로 자신의 이름 여호와를 알려주셨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설명으로 알려지는 이름이 아닙니다. 해방의 사건 속에서 체험되는 이름입니다.
그들이 듣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반응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이 영혼을 둔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억압이 약속을 들을 귀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무감각을 넘어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이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알기를 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하셨듯, 오늘 우리에게도 적극적으로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실 것입니다.
머리와 지식으로만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어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설 명절에 내가 안다고 여겼던 이들과 더 깊은 관계를 맺어 더 많이 이해하고, 용서하고,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시간으로 삼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다가가셨습니다. 이번 명절, 우리 가족 중에 마음 문을 닫은 이가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오셨듯 우리도 먼저 한 걸음 다가가 이름을 불러주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한 주간 평안하십시오. 한 주간 더욱 노력하여 관계를 맺어가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과 이해로 다가오셨듯, 우리 역시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