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합류 – 2026년 06월 21일
요나서 3장 1-10절, 사도행전 16장 6-15절, 마태복음서 28장 16-20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참 평안을 선택하고 누릴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후 넷째주일이자 6·25 민족화해주일입니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한 민족이었던 한반도가 당시 열강에 의해 38선이 그어지고 강제적으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인 남북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1953년 정전협정을 통해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현재 81년째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지내고 있습니다.
한때는 통일에 대한 열망과 평화 분위기로 통일이 곧 될 것 같은 분위기도 있었으나 현재는 통일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실현 불가능한 일로 판단이 되자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서 두 국가로 인정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구해보자고 말합니다.
합리적인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남과북의 통일 운동을 하는 건 이제 멍청한 일이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입니까?
우리가 매주 화요일마다 연대하는 세종호텔 부당해고 철회를 위한 기도회 현장은 어떻습니까? 고진수 지부장이 336일의 고공농성을 마치고 땅으로 내려온 뒤 2번의 협의 과정이 있었지만 무산되었고, 그 이후 고진수 지부장은 감옥에 갇혔다가 보석으로 겨우 풀려난 상황이고, 대법원에서 사측의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정리해고는 부당하지 않게 된 상황입니다. 이 투쟁의 상황도 5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연대하는 일은 바보 같은 일이고, 시간만 허비하는 일에 불과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기준과 경험으로 어떤 일은 된다, 안 된다를 자주 판단합니다. 그 판단과 계산을 통해 어떤 일은 뒤로 물러서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일들은 얼마든지 이렇게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준과 지식과 경험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은 성도가 먼저 포기해서도, 물러서도 안 됩니다.
성도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평화를 이루는 일에,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물러섬 없이 전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하라 하시니 순종하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언제 예수님이 가능한 일만 하셨습니까? 언제 바울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서 먼저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했습니까?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하는 경우는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오로지 성령이 그 길을 막으실 때만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먼저 계산하고, 판단해서 뒤로 물러서고 포기합니다. 정의를 이루는 일,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일지라도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그런 우리의 태도가 옳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세 본문에 나오는 변화들은 모두 당시에 불가능한 일이었고, 불가능한 도전이었습니다. 한 번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세 본문은 불가능한 일을 해야 한다고 권면하며,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하지 말라고 말하고, 포기하라고 말하고, 물러서라고 말하고, 될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성도는 왜 해야 합니까? 성도는 왜 그 일들을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그 일들을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시고, 이루어가십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성도는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그 일에 ‘합류’할 뿐입니다.
두 개 이상의 물이 합쳐지는 것, 통상 지류가 보다 큰 강에 흘러드는 현상을 ‘합류(合流)’라고 부른다고 네이버 사전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 강은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평화의 물줄기이고, 우리는 그 큰 강에 합류하여 더 큰 강과 더 센 물줄기를 만들어내는 지류입니다.
큰 강은 바다로 향해 나아가는 목적이 분명하고, 지류는 이미 목적지가 정해진 큰 강에 합류합니다. 성도의 삶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분명한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성도는 합류하면 됩니다.
첫 번째로 살펴볼 본문의 주인공은 요나입니다. 요나에게 니느웨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조국 이스라엘을 잔인하게 짓밟았던 앗수르의 수도, 즉 뼈에 사무친 원수의 땅이었습니다. 요나는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반대 방향인 스페인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폭풍을 통해 요나의 방향을 바꾸셨고, 요나는 결국 ‘또다시’ 임한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니느웨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요나가 마지못해 회개를 선포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왕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온 성이 재를 덮어쓰고 회개하는,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다. 이 소문이 니느웨의 왕에게 전해지니, 그도 임금의 의자에서 일어나, 걸치고 있던 임금의 옷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았다.”(요나 3:5-6)
사실 요나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내심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요나서 4장 1-2절을 보면 이렇게 항변합니다.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그는 주님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요나 4:1-2)
요나의 이 고백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평화와 자비의 큰 물결은 이미 니느웨 백성들을 향해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요나는 그저 투덜거리며 그곳에 발을 담근 작은 지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라는 지류가 마지못해서라도 하나님의 큰 강에 합류했을 때, 그 물결은 더욱 힘차게 나아가는 생명의 동력을 얻었고, 성 전체를 뒤집는 놀라운 은혜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 물결은 상대를 고르지 않습니다. 원수라 할지라도, 자격이 없어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그 강물은 차별 없이 흐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본문인 사도행전의 바울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너무나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에게는 훌륭한 계획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인만의 작은 물결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거나, 하나님의 큰 물줄기와 방향이 다를 때, 하나님은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이라는 지류가 하나님의 더 큰 물줄기에 합류할 수 있도록 마케도니아로 그의 걸음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평화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마케도니아의 첫 성 빌립보로 건너갔을 때,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사도행전 16장 14-15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 가운데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감 장수로서, 두아디라 출신이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여셨으므로, 그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 여자가 집안 식구와 함께 세례를 받고나서 ‘나를 주님의 신도로 여기시면, 우리 집에 오셔서 묵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우리를 강권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바울이 그곳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행하고 계신 평화의 역사에 바울이 합류할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고집과 울타리를 넘어서 마케도니아라는 낯선 땅, 소외된 여인들이 모여 있는 이미 평화를 이루고 계시는 물줄기에 합류했을 때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요나가 자신의 의지를 꺾고,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울타리를 넘어 니느웨 백성들을 향해 평화의 물결에 합류하게 된 장면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성도의 사명은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울타리를 넘어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28장의 제자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당시 갈릴리에 모인 제자들의 상태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7절은 여전히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완벽한 믿음의 모습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저 참여하라고, 합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심하고 주저하는 제자들을 향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라는, 세상을 뒤집는 평화의 큰 물줄기로 초대하셨습니다. 연약한 지류인 제자들을 향해 그 거대한 역사에 합류하라고 독려하신 장면입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이후 모든 민족을 향해 나아가 제자를 삼을 수 있었습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하시겠다는 약속, 바로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제자들이 큰 물줄기에 합류할 때,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 거대한 물줄기에 합류하기만 하면, 친히 함께하시며 앞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세 본문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내가 원하지 않는 낯선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기준과 목적을 꺾고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신 큰 물줄기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요나와 바울이, 제자들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고 계신 평화의 큰 물줄기에 합류했습니다. 계산이 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뛰어들었을 뿐입니다. 그저 합류했을 뿐입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통일을 향한 평화의 발걸음, 억울하게 거리에 나앉은 노동자들을 향한 연대의 행동을 두고,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이제는 안 된다, 끝났다”라고 계산하며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계산과 판단을 내려놓으라고 권면합니다. 그저 이미 척박한 이 땅 위에서, 소외되고 눈물짓는 이웃들의 곁에서 맹렬히 평화를 이루고 계시는 하나님의 큰 물줄기에 용기를 가지고 ‘합류’하는 것, 그것이 오늘 이 시대 성도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결코 가능해 보여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그곳에 평화의 물줄기를 흘려 보내고 계시기 때문에 성도는 물러서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용기 내어 그 물줄기에 나의 삶이라는 작은 지류를 보탤 때, 바로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평화의 역사를, 세상이 줄 수 없는 벅찬 은혜를, 그리고 모든 장벽을 뛰어넘는 위대한 사랑을 말입니다.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나의 일터, 동네에서 누군가 소외되어 있거나 부당한 취급을 받고 홀로 서 있는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이번 주에는 그분들에게 먼저 다가가 따뜻한 인사 한마디를 건네거나, 커피 한 잔을 나누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 작은 다가감 하나가 하나님의 거대한 물줄기에 나의 물결을 보태는 위대한 연대의 시작입니다.
내 마음속 ‘니느웨’를 향해 평화의 기도를 심는 것도 방법입니다. 나와 정치적 생각이 달라서, 혹은 나에게 상처를 주어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린 대상이 있다면, ‘저 사람은 절대 안 변해’라고 포기했던 분들이 있다면 기도해 보십시오.
이번 한 주간, 판단하고 정죄하던 마음을 잠시 멈추고, 그 사람을 위해 평화의 기도를 올려 보십시오. 내 고집을 꺾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그 순간, 우리의 굳어진 마음이 깨어지고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내 작은 울타리를 넘어 주님이 일하시는 평화의 강물에 기쁨으로 합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