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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 2026년 07월 26일

이사야서 1장 1-8절, 마태복음서 8장 1-13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기도 묵주’를 통해 기도하시면서, 그 순간 주어지는 평안 그리고 확장되는 평안, 지속되는 평안을 경험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중드, 그러니까 중국 드라마를 보면서 인상적인 한 장면을 보게 되었고, 그 장면의 대사를 생각하다가 ‘성도님들과도 이 장면과 관련된 이야기를 꼭 나누어야겠다.’라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장면이고 대사였는지는 설교 마지막에 말씀드리겠지만, 이 장면의 주된 핵심은 ‘정체성’과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일 교회력 본문인 이사야와 마태복음 본문이 마침 이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성도는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두 본문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사야의 본문입니다. 66장이나 되는 이사야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다.”

이사야서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 가장 나라가 번창했던 시기를 포함해 점점 쇠락해져 가는 남유다를 배경으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이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이사야서에는 이스라엘의 왕, 기득권자, 종교 지도자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이스라엘이 어떻게 부패하고, 하나님을 등지게 되었는지가 이사야 전체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물론 회복의 말씀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이 아닌 이방 신들을 좇아가게 되었습니까? 2절의 말씀입니다. “2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자식이라고 기르고 키웠는데,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

이 2절 말씀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게 된 근원적 문제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부르십니까? ‘내 자식’, ‘내가 자식이라고 기르고 키웠는데!’ 하나님이 자식이라고 키웠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

비탄의 목소리는 이어집니다. “3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 4 슬프다! 죄 지은 민족, 허물이 많은 백성, 흉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 너희가 주님을 버렸구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겨서, 등을 돌리고 말았구나.”

‘주님을 버렸구나!, 등을 돌리고 말았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녀라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키우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거역하였고, 버렸고, 등을 돌렸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녀입니다. 자녀에 대한 표현은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신명기 32:18 “너희는 너희를 낳은 바위를 버리고, 너희를 낳은 하나님을 잊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은 경위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15 이스라엘은 부자가 되더니, 반역자가 되었다. 먹거리가 넉넉해지고, 실컷 먹고 나더니, 자기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반석이신 구원자를 업신여겼다. 16 그들은 이방 신을 섬겨서 주님께서 질투하시게 하였으며, 역겨운 짓을 하여 주님께서 진노하시게 하였다. 17 너희는 하나님도 아닌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너희가 알지도 못하는 신들, 새롭게 나타난 새 신들, 너희 조상이 섬기지 않던 신들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녀로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호세아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1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2 그러나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짐승을 잡아서 바알 우상들에게 희생제물로 바치며, 온갖 신상들에게 향을 피워서 바쳤지만, 3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4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얼마나 절절한 사랑의 표현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게 보호하셨고, 입히셨고, 먹이셨고, 키우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이 받을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 본문에서 이런 사랑과 특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행동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거역하였다. 버렸다. 등을 돌렸다.”라고 기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리면 어떤 삶의 방향으로 흘러갑니까?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이룬 것이라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자신들의 소유, 힘, 능력으로 안전과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소유, 힘, 능력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기 시작합니다. 소유, 힘, 능력이 자신들의 가치를 결정하고, 존재 이유를 설명하게 됩니다. 그렇게 비교하고, 차별하고, 인정을 받으려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을 때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알았기에 소유, 힘, 능력이 자신들의 존재 가치나 이유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이미 존재적으로 완전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할 이유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3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렸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소유, 힘, 건강, 능력은 쇠하고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들의 소유와 힘과 능력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잊어버렸을 때, 그래서 자신들의 소유, 힘과 능력으로 무언가를 하려 할 때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고,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도 이와 다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참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끊임없이 헛된 것들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으려 할 때, 사람은 황폐해지고 맙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들을 끊임없이 봅니다. 재벌로부터, 연예인으로부터, 정치인으로부터, 권력자, 기득권자로부터 끊임없이 봅니다. 그 소유가 자신의 정체성이 될 때, 그 학벌이 자신의 정체성이 될 때, 그 인기가 자신의 정체성이 될 때, 그 인정이 자신의 정체성이 될 때, 그 무엇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 훼손되거나 사라지게 될 때 혹은 그 정체성을 잃어버릴까 두려움에 휩싸이게 될 때 사람은 황폐해지고 맙니다.

그래서 그 무가치하고 아무것도 아닌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불법과 폭력과 불의와 거짓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5 어찌하여 너희는 더 맞을 일만 하느냐? 어찌하여 여전히 배반을 일삼느냐? 머리는 온통 상처투성이고, 속은 온통 골병이 들었으며, 6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성한 데가 없이, 상처난 곳과 매맞은 곳과 또 새로 맞아 생긴 상처뿐인데도, 그것을 짜내지도 못하고, 싸매지도 못하고, 상처가 가라앉게 기름을 바르지도 못하였구나.”

그렇게 헛 된 삶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역시나 오늘 본문처럼 귀결됩니다. “7 너희의 땅이 황폐해지고, 너희의 성읍들이 송두리째 불에 탔으며, 너희의 농토에서 난 것을, 너희가 보는 앞에서 이방 사람들이 약탈해 갔다. 이방 사람들이 너희의 땅을 박살냈을 때처럼 황폐해지고 말았구나. 8 도성 시온이 외롭게 남아 있는 것이 포도원의 초막과 같으며, 참외밭의 원두막과 같고, 포위된 성읍과 같구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잊었을 때, 그래서 영원하지 못한 것들을 향해 달음질 치게 될 때, 이스라엘은 황폐해지고, 외로이 남게 됩니다. 소유, 힘, 건강, 능력을 잃어버리면 그 곁에 누가 남습니까? 아무도 남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시급히 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 거기서부터 이스라엘의 문제는 바로 잡힐 수 있습니다.

이 정체성의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예배 형식을 바꾸면서 예배 가운데 ‘죄의 고백’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의 고백 시간에 저는 늘 한 가지만을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 기도 외에 다른 기도는 예배 시간에 드린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제가 저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살았다면 그것이 바로 저의 죄이겠지요. 우리의 죄이겠지요. 다시 제 자신이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 시간 기억하게 하소서. 깨닫게 하소서.”입니다. 저는 오로지 이 기도만 드립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릴 때, 성도의 삶은 필연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른다면, 끊임없이 헛된 것들을 통해 자기 증명을 하려 들텐데, 그럼 그 때 성도는 오늘 본문의 표현처럼 ‘더 맞을 일만 하느냐?’라는 일갈을 들을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인식하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함께 읽은 마태복음 8장의 본문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많은 무리가 그를 따라왔다.” 참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하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이제 나올 나병 환자나 백부장과 같은 은혜를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다가와 절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뒤에 나올 백부장도 중풍으로 고생하고 있는 자신의 종을 위해 간청하며 예수님에게 처음 고백한 말이 바로 “주님”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다는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았다는 증거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요한복음 1:9-12 “9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나병 환자, 백부장 모두 어떤 사람들입니까? 부정한 자, 죄인, 이방인입니다.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기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았고 그래서 그 자녀 된 권세를 누리고자 예수님에게 요청했습니다.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 나는 주님을 내 집으로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마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명확합니다. 의심이 없고,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 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0b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12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지막 구절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울며 이를 갈 이 나라의 시민은 누구입니까? 이 시민의 다른 표현은 상속자들, 아들들입니다. 바로 혈통으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여겼던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쫓겨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기 정체성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버렸기 때문이고, 등 돌렸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들은 다른 것들, 우상들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경고가 되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우리에게 없을 때. 그래서 헛된 다른 것들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으려 애쓰며 살아갈 때. 우리 역시 쫓겨나 울며 이를 갈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기독교 지식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 지식뒤에 자신의 믿음 없음을 숨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연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 연수 뒤에 자신의 믿음 없음을 숨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헌금 생활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 뒤에 믿음 없음을 숨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직분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 직분 뒤에 믿음 없음을 숨기는 것입니다. 모두 우상입니다. 이건 목사도 동일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단 하나의 정체성이면 충분합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입니다. 이 정체성 위에만 오로지 바른 신앙을 세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정체성입니다. 깨닫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거부하고 살아갑니까? 혹은 잊어버리고 살아갑니까?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영원한 것보다 유한한 것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소유와 직위와 명예와 권력과 힘과 건강을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 남들보다 더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고, 남들보다 더 특별해질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헛된 욕망이, 그 헛된 욕망이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장 특별한 정체성을 잊도록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제국을 쫓아다녔고, 부와 소유, 힘과 권력을 상징하는 우상들을 쫓아다닌 까닭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맞을 짓을 했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수많은 무리, 혈통으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인 유대인들은 어떤 은혜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성도님들은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이제 제가 본 중국 드라마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성한찬란’이라는 제목의 중국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황제는 검소합니다. 이제 막 나라를 평정하고 황제가 되었기에 백성들의 본이 되는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부인들에게도 자녀들에게도 신하들에게도 이 검소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황제의 한 딸은 자신을 화려한 장신구와 옷으로 늘 꾸미기를 좋아했습니다. 주어지는 돈이 부족하다 보니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장사를 하기도 하고, 사기를 치고 불법을 서슴없이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본 엄마가 딸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앞으로 입궁할 때는 그렇게 치장하지 마라.”, “너는 봉황으로 태어났으면서 어찌 꿩 행색을 하고 있느냐!”

이미 봉황으로 태어났기에,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치장할 필요가 없다. 그냥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너는 이미 특별하고, 뛰어나다. 그런데 왜 형편없는 꿩 행색을 하고 있느냐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태도가 그렇습니다. 이미 그 무엇보다 특별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꿩 행색을 하기 위해 그토록 애쓰면서 살아가냐는 말입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을 증명해도 결국 그 모든 증명은 봉황보다 못한 더 나은 꿩, 좀 더 나은 꿩, 훌륭한 꿩밖에는 안 되는데 말입니다. 이미 봉황인데, 우리 존재 자체가 이미 봉황인데.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완전한 존재인데, 우리는 무엇을 더 증명하기 위해 꿩처럼 꾸며야 하겠습니까?

이제 그 모든 헛된 수고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다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으십시오. 그 위에만 오로지 바른 신앙을 세울 수 있습니다. ‘오로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위에만 바른 신앙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미 저와 성도님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정체성과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정체성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 때, 우리는 잘못된 방향성의 삶과 헛된 노력을 멈추고 나병 환자가 경험한, 백부장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