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공동체 – 2025년 8월 3일
마가복음서 6장 34-44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성도님들의 삶이 평안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안해야 비로소 말씀이 보입니다. 평안해야 비로소 성도로서 살아야 할 좁은 길이 보입니다.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건, 어떤 일을 겪고 있건, 다시 평안을 택하여 하나님께 삶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주간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2024년 오륜교회에서 영상 제작 팀장으로 일하다 과로사로 돌아가신 분의 소식이었습니다. 관련 기사를 읽으며 참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분과 관련해서 “돈 귀신이 교회를 이겼다.”라는 기사 제목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성도님들과 자세하게 나누고자 합니다. “서울 대형 교회 중 하나인 오륜교회 방송실에서 일하던 A 영상제작팀장이 지난해 12월 11일 과로로 사망했다. 평소 지병 없이 건강하던 A 팀장은 과로사의 대표적 원인으로 알려진 심장비대증으로 인한 급성 심장사로 사망했다는 진단이 나왔다. 2024년 11월 1일부터 3주간 열린 교회의 대표적 행사 ‘다니엘기도회’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특히 그는 근로기준법이 정한 근로시간 상한선인 주 52시간을 훌쩍 넘는 주 63시간 근무를 3주 연속하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출처: 뉴스앤조이] ‘다니엘기도회’의 비극…3주 연속 63시간 일한 오륜교회 직원, 과로로 사망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공동대표 정병오·신동식·이상민)은 오륜교회 방송제작 팀장 과로사 사망 사건에 대해 (지난주) 7월 25일 성명을 발표해 “오륜교회 방송실 영상제작 팀장의 과로사와 이후 교회가 보인 증거 제출 비협조와 비정한 태도가 한국교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오륜교회의 ‘다니엘기도회’를 통해 많은 은혜를 누렸던 그리스도인들이 그 이면에 3주 동안 주 63시간이라는 죽음에 이를 정도의 노동 착취가 있었다는 사실을 접하며 이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하며 큰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출처: 뉴스앤조이] 기윤실 ‘오륜교회, 직원 과로사 이후 보인 태도에 한국교회 큰 충격’
한용현 변호사는 이번 사건의 근본적 원인이 교회의 부당 해고와 외주화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부당 해고로 인력을 감축하고 수년이 지나도록 인력을 충원하지 않았고, 실장은 부당한 지시를 내려 근로자들이 굉장히 힘들어했다. (다른 곳도 아닌) 교회가 수익을 창출하려는 자본 논리를 따르고, 그에 따라 특정 인물들을 배제하기 위해 해고시킨 사실은 매우 부적절한 행위로 보인다.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자초해 낸 위기를 방치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남은 근로자들이 과로를 하게 됐고 결국 죽음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일반 사업장에서 벌어졌다고 해도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출처: 뉴스앤조이] ‘다니엘기도회’의 비극…3주 연속 63시간 일한 오륜교회 직원, 과로로 사망
돌아가신 오륜교회의 A 영상제작 팀장님 아내 되시는 분은 자신과 비슷한 억울한 상황에 놓인 노동자분을 추모하는 자리에 참석하셔서 이런 이야기를 인터뷰 중에 해주셨습니다.
“오륜교회처럼 대형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다들 좋은 옷을 차려입고 믿음 좋은 척하면서 외형적인 것에 관심을 많이 두잖아요. 그런 모습들이 가식적이라고 느낄 때가 많았는데 여기서 만난 분들은 수수한 차림이셨지만 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해 주셨어요. 나누는 대화에서 정말 따뜻함이 느껴지더라고요. 휴지를 건네실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저는 그동안 교회 관계자들이 한 어떤 위로보다 더 큰 위로를 받았어요. ‘하나님 믿으면 잘 살고 복받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정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뭘까. 예수님을 닮은 사람과 삶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됐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나만 복 받고 나만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에 진짜 필요한 도움이 무엇일까를 생각할 수 있어야겠구나 싶었어요. 그게 예수님의 사랑 아닐까요? 남편의 죽음 이후 선한 사마리아인 묵상을 많이 했어요. 저 또한 레위인처럼, 제사장처럼 이웃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는데, 이 일을 통해 남의 아픔을 보면 외면하지 않고 안아 주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남편이 섬겼던 교회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산재 승인이 나도 교회가 돈을 주는 게 아니잖아요. 처음에 산재를 약속하지나 말지, 왜 말을 바꾸면서 자료를 주지도 않았을까요. 그러면서도 설교에서는 사랑하라, 불의에 참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 거짓과 위선에 너무 어이가 없고 황당했죠. ‘너나 잘하세요’라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제 지인의 남편도 산재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퇴원할 때까지 동료들이 돈 10~20만 원을 모아서 생활비를 마련해 줬다고 하더라고요. 세상에서도 이렇게 하는데 교회는 뭐하는 건가요.
제가 바라는 건 딱 하나예요. 진심 어린 사과. 교회가 산재 접수를 방해하는 과정에서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말 돌리면서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사과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출처: 뉴스앤조이] ‘바라는 건 딱 하나, 교회의 진심 어린 사과’
이 기사를 보면서 참담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예배, 우리의 묵상, 우리의 찬양, 우리의 기도, 우리의 앎이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대체 우리는 무엇을 했던 것이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기만족을 위해? 자기과시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이들에게 예배가 부족했습니까? 아니요, 그 어떤 교회보다 더 갖춰진 예배, 화려한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가 부족했습니까? 아니요, 눈물 흘리며 새벽과 밤마다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찬양이 부족했습니까? 아니요, 세계 그 어느 곳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음악으로 찬송했습니다. 배움이 부족했습니까? 아니요, 단계별 맞춤 성경 공부를 비롯해 많은 제자 교육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교회 노동자의 죽음에 전적인 책임을 지고,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는 대신. 사과하지 않고, 회피하며 책임지려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보다도 더 못한 기준, 도덕성, 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여전히 정의와 사랑을 운운하고, 은혜를 운운할 수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부조리한 구조와 착취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한 그들이 어떻게 교회이고, 목사이고, 성도입니까?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아는 바를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백한 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망한다!”라고 말한 아모스 선지자의 선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역겹다. 기쁘지 않다, 받지 않겠다.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집어치워라. 듣지 않겠다.” 이 아모스의 선포에서 우리는 과연 자유로울까요?
오륜교회를 비판하고, 오륜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을 비판하지만, 이상중 목사는 뭐가 다른가요? 교회 밖으로 범위를 조금만 넓히면 저 역시 침묵하고, 동조하는 자에 지나지 않을을 깨닫고 부끄러워집니다.
오륜교회와 그곳의 성도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자신은 과연 그 비극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 우리 교회의 울타리 밖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 소리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을 던져보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곳이 아니라, 죽어가는 생명이 다시 회복되고 살아날 수 있는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는 모임이자,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목회 계획을 구상하면서, 또 이러한 현상들을 보면서 우리 교회는 반드시 우리 교회의 이름처럼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회복시킬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교회 로고 이야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가난하고 낮고 천하고 약하기 때문에 늘 주변부에 머물렀던 민중들을 불러 모으고, 풍성한 하늘나라의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했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자신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예수와 함께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생명을 살리고 사랑이 넘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교회 로고에 담긴 의미입니다. ‘예수와 함께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생명을 살리고 사랑이 넘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의미의 근거를 예수님이 민중에게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가지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셔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예수님이 기도하시자 누군가가 감동되어 각자 가지고 있는 것을 꺼내기 시작했는데,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는 양을 서로가 내어놓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아예 이 본문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상징과 비유로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건 변하지 않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에 등장하는 ‘큰 무리’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을 찾아온 ‘큰 무리’를 보셨습니다. “34a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이 큰 무리는 누구입니까? 늘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 가난하고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사회로부터 외면받고 착취당했던 ‘영적 과로’와 ‘사회적 과로’에 시달렸던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예수와 제자들을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 하셨는가?’라는 질문은 ‘오늘 우리는 누구와 함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당신은 어떤 이들의 이웃이 되어주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며, ‘지금 당신의 주변에 누가 있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저와 성도님들의 주변에 누가 있습니까? 혹시 도움이 필요 없는, 건강한 이들만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선택한 사람들만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와 제자들은 언제나 이렇게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불쌍한 이들’과 함께 하였고, 그런 이들이 예수와 제자들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변하지 않는 다른 하나는, ‘가르침을 주셨다.’입니다. “34b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먹을 것을 주셨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르침을 주었다는 구절은 한 절로 끝나지만, 입으로 들어가야 할 양식과 관련해서는 긴 구절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울이 회개하는 과정을 보면 사울은 동역자들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고 또 새롭게 부여받을 뿐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사도행전 9:19a)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에게 준비되었던 것은 동역자와 말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을 회복시킬 음식도 함께 준비해 주셨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영혼을 채우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굶주린 육신을 채우는 빵을 함께 주셨습니다.
이 기적이 예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일어났든, 공동체 구성원들의 나눔으로 일어났든, 혹은 상징적인 의미이든, 중요한 것은 그 모든 방식 속에서 ‘목자 없는 양’들이 배부르게 먹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바로 이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는 가르침의 장소, 먹을 것을 주신 장소도 중요합니다. 편안하고 안온한 자리가 아닌, 민중이 찾아올 수 있는 장소, 밖에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교회 안을 벗어나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새번역),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공동번역)
복을 받는 비결이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삶,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하게 또 자비롭게 대하시며 생명을 살려주시는 것.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덧입는 삶이 바로 복입니다.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가 오늘 본문 말씀을 근거로 로고를 만들었습니다. 오륜교회의 교회 노동자의 과로사 사건은 우리에게 ‘나는 과연 어떤 이들의 이웃이 되어주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줍니다. 로고에 담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단순한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목자 없는 양’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상징하며, 그들의 굶주림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다짐을 의미합니다.
이 로고의 의미를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우리 공동체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작은 관심이라도 보여주는 것. 교회 안팎에서 벌어지는 부조리에 침묵하지 않는 것. 그리고 우리가 가진 작은 빵과 물고기라도 기꺼이 나누는 삶을 선택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공동체’가 되는 첫걸음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누군가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진정한 공동체로 세워져 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그리고 세상의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긍휼의 눈길을 보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비롭게 대하시고, 우리를 통해 이 땅의 회복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