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하나님이 주시고, 이루신 일입니다. – 2026년 07월 05일
신명기서 16장 9-12절, 고린도전서 12장 4-11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삶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상황과 관계, 일에 쫓기다 보면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스스로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종종 우리는 이런 상황을 겪곤 합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면서 사실은 내가 이런 정신없는 삶,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을 외부와 타인의 탓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외부의 상황이 변하지 않아도, 환경이 바뀌지 않아도 언제든 다시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까? 성도에게 평안이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이 평안을 다시 선택하고 누릴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 주일 성도님들 가운데 헌금함 위에 놓인 ‘맥추감사헌금’ 봉투를 보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보신 성도님들이 ‘어? 이거 뭐지?’라고 생각하셨을 수 있겠다고 지난 주일 오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게 된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7월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 절기로 정해서 드리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지난 주일에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부임한 후 작년 맥추감사주일은 어떻게 보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주보 자료와 제가 성도님들과 나누었던 설교문을 찾아보니 절기 이름만 명시했고, 제가 개인적으로 맥추감사헌금을 드렸을 뿐 성도님들에게 따로 안내하거나 설명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 맥추감사주일과 관련해서 목회운영위원회에서도 이야기 나누면서 성도님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기에 감사는 추수감사주일로 한정해서 지키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최선을 다해 교회 생활과 헌금 생활을 하시는 성도님들을 위한 배려의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우리 교회가 어떤 맥락에서 맥추감사주일을 지키지 않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모든 절기를 잘 지키면서 맥추감사주일만 빠져 있는 게 여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임 목사님은 이유를 알까 싶어서 연락을 드렸더니, 본인이 오기 전부터도 드리지 않았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본인도 왜 드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원로 장로님께도 연락을 드렸더니, 왜 드리지 않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답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생명교회 때부터 드리지 않았나 싶어 생명교회 목사님에게도 연락했더니 생명교회는 맥추감사주일을 잘 지키고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알아본 이유는 맥추절이라는 이 절기가 단순히 보리(麥)와 가을(秋)에서 온 말이기 때문에 익은 보리를 거두는 시기를 뜻하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1년에 절반을 보내면서 나 그리고 우리와 동행하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의미가 담긴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한 주간 고민하다가, 이건 한 번 말씀드려야 겠다 싶어서 성도님들과 맥추절의 의미를 되새기고 내년부터는 제대로 지킬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맥추감사주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구약 전통에서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그리고 오늘날에는 이 맥추감사주일을 어떻게 지키면 좋을지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내 삶에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시간도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우리가 조심하고 넘어가야 할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말씀드리려고 하는 이 점은 부끄럽게도 특히나 저와 같은 목사들이 많이 생각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절기를 이야기할 때, 절기에 관한 의미보다 앞서서 ‘헌금을 위해 있는 날’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절기는 평소보다 더 많이 헌금을 내는 날이 아닙니다. 절기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니 오늘 신명기 본문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감사한 마음이 우러나서 헌금을 낼 수는 있어도, ‘절기는 헌금이다.’라는 공식은 저부터도 그렇고 우리가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할 지점입니다.
절기의 의미에 대한 지각 없이 헌금만 드리는 절기를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왜 이런 날이 우리에게 주어졌는지를 때마다 더욱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맥추절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각기 다른 시점과 상황 속에서 맥추절을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시내산에 머물던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애써서 밭에 씨를 뿌려서 거둔 곡식의 첫 열매로 맥추절을 지켜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생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내 땅도, 내 씨앗도, 내 수확도 온전히 가져본 적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자신들의 씨앗으로 첫 수확을 하게 되었을 때 그 감동이 얼마나 컸을지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내 집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내 집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과 비교될 수 있을까요? 저도 집을 소유해 본 적은 없어서 알지 못하는 기쁨이긴 합니다. 다만 늘 살던 곳에서 내몰릴 수 있고, 언제 옮겨야 할지 모르는 불안한 삶의 입지에서 벗어나 ‘안정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추측만 해봅니다.
그렇기에 보리의 수확은 먹거리를 수확하게 되었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습니다. 기적이자,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것이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장차 너희 땅에 씨를 뿌리고, 수고하여 첫 열매를 거두게 하겠다. 그때 그 수확이 너희의 능력이 아니라 나의 은혜임을 기억하며 내게 첫 열매를 바치라”라는 의미로 맥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맥추절은 우리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절기입니다.
레위기 23장에서도 하나님은 맥추절을 다시 언급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15 “너희가 안식일 다음날 곧 곡식단을 흔들어서 바친 그 날로부터 일곱 주간을 꼭 차게 세고, 16 거기에다가 일곱 번째 안식일 다음날까지 더하면 꼭 오십 일이 될 것이다. 그 때에 너희는 햇곡식을 주에게 곡식제물로 바쳐야 한다.”
가나안 땅 입성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신명기 16장에서도 이 맥추절에 관하여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9 “그로부터 일곱 이레를 세는데, 밭에 있는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시작하여 일곱 이레를 세십시오. 10 그리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신 복을 따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물을 가지고 와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칠칠절을 지키십시오.”
맥추절 또는 칠칠절로 불리는 이 절기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신명기 16:12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기억하고, 이 모든 규례를 어김없이 잘 지키십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집트에서는 아무리 땀 흘려 추수해도 모두 파라오의 창고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맥추절은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누군가의 착취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자신들의 땅에서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얻게 되었습니다. 맥추절은 단순히 배부름을 기뻐하는 날이 아니라, 종살이에서 자유인이 된 해방의 축제였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매일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에 의존해야만 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땅을 일구고 ‘첫 열매’인 보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마침내 이루어졌음을 의미했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더욱 경험하는 시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의 원주민들이나 주변 강대국들은 힘과 부를 독점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추수 때 밭 모퉁이를 남겨두고, 이주민과 고아와 과부와 한 식탁에 앉았습니다.
이렇게 맥추절은 이스라엘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거룩한 공동체임을 세상에 증명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이 세 권의 성경을 통해 맥추절을 거듭 강조하신 이유는,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였고, 약자들과 함께 기뻐하라는 이유였습니다.
이 정신은 사도 바울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도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얻은 첫 곡식을 ‘내 능력과 농사 기술’로 얻었다고 착각하기 쉬웠듯, 고린도교회 성도들 역시 자신들이 받은 영적 은사와 사역의 성과를 ‘나의 탁월함이나 영적 우월성’의 결과로 착각했습니다.
출애굽기가 “이 수확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선포했다면,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고전 12:11)라며 은사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재능, 직장, 사회적 지위, 심지어 교회 내에서의 직분과 사역의 열매조차 내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를 나의 ‘소유’나 ‘훈장’으로 여기는 순간 교만이 싹틉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일하심을 위해 쓰임 받는 통로일 뿐이라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레위기의 맥추절 말씀에서 “수확물을 혼자 독점하지 말고 밭 모퉁이를 남겨두라.”라고 명령하신 것은 은혜의 사유화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비극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자기 과시나 개인의 영적 만족을 위해 사유화한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고전 12:7)라고 못 박았습니다. ‘그 은사를 누가 주셨는가? 왜 주셨는가?’를 반드시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 소유, 권리는 나만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밭 모퉁이를 이웃에게 내어주듯, 우리의 재능과 은사는 공동체 안과 밖의 타인과 약자들을 향해 흐를 수 있어야 합니다.
신명기가 “네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라며 약자의 위치를 상기시킨 것처럼, 고린도전서의 오늘 말씀은 눈에 띄는 사역이나 성공적인 결과물이라는 세상의 기준으로 서로의 은사를 비교하고 판단하던 고린도교회의 교만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사도 다르고 직분도 다르고 사역의 모양도 다르지만,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이 이루셨다는 선포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맥추감사주일은 단순히 한 해의 절반을 무사히 보낸 것을 축하하거나, 그저 의무감으로 헌금을 드리는 날이 아닙니다. 절기는 우리의 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맥추감사주일은 내 삶의 모든 성취와 평안, 그리고 내가 가진 영적인 은사마저도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고, 이루신 일’임을 겸손히 고백하는 감사의 고백이 이루어지는 날이 되어야 하고, 성도로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금 다짐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재능이나 물질, 혹은 삶의 평안을 허락하셨다면, 그것은 우리만의 성을 높이 쌓으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맥추절의 전통처럼, 우리 삶의 ‘밭 모퉁이’를 이웃에게 기꺼이 내어주라는 부르심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은 이러한 부르심에 따라 부당한 현실과 구조적인 어려움 속에 치여 벼랑 끝에 선 이웃들, 그리고 위로가 필요한 우리 곁의 형제자매들을 향해 우리의 시간과 마음,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기꺼이 내어줄 수 있어야 함을 돌아보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올해 상반기 동안 우리와 동행하신 하나님께서, 남은 하반기의 삶도 신실하게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이루신 삶의 열매, 은혜의 열매를 공동체 안과 밖의 이웃들과 넉넉히 나누며,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의 삶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