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정주현 목사] 모든 생명을 다스리는 인간 – 2026년 09월 13일

창세기 1장 26-31절, 누가복음서 12장 4-7절

오늘은 창조절 둘째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고, 그 의미를 삶으로 살아내고자 다짐하고 실천하는 창조절답게 요즘의 날씨는 하나님의 창조질서 순환을 피부로 체감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살아가는 우리가 오늘 마주하는 본문은 창세기와 누가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를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하고 결심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지난 여름방학에도 한 주에 한 두 번씩은 탐조를 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에게 탐조는 취미이자 동시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영성 활동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탐조는 빌딩과 사람들 그리고 책과 노트북 모니터와 스마트폰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 넓고 광활한 공간으로 시선을 옮기고, 그 공간에서 오롯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느끼며 아무런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활동입니다.

그리고 배낭을 짊어지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걷는 것, 그러다 때론 한없이 기다리고, 타는 듯한 태양과 끓어오르는 대지의 더위를 온 몸으로 받아내는 행위로서의 탐조는 그 자체로 제 몸과 영혼을 정화하는 시간입니다.

그 순간 속에서 제가 마주했던 경이로운 순간들을 이 시간 모두 나누기에는 시간인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한 장면만을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PPT1) 이 사진은 8월 마지막 주간에 만난 뒷부리도요란 새입니다. 저는 이 새를 꽤 멀리서 발견한 탓에 이렇게 형체 정도만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PPT2) 그래서 이 새가 어떤 새인지 국립생태원의 자료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이 새는 부리부터 꽁지깃까지 약 20cm가 조금 넘는 크기의 작은 생명체입니다. 쌍안경 같은 광학기기로 이 새를 지켜본다면 아름답고, 개성 있는 모습에 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뒷부리도요는 작고 귀여운 생김새로는 가늠이 안 될 정도로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일까요? 이 새가 일년동안 이동하는 거리와 그 환경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 작은 새가 얼마나 강한 생명력을 가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PPT3) 다음 자료를 보면, 뒷부리도요의 놀라운 이동거리와 환경을 알 수 있습니다. 뒷부리도요는 러시아 북부의 습지대와 동남아시아 또는 오세아니아 지역까지 봄과 가을에 두 번 씩 이동합니다. 게다가 이들이 이동하는 장소의 중에는 태평양이란 망망대해도 있습니다.

이들이 태평양에 진입하기 시작하면 짧으면 수 일 길게는 열흘이 넘도록 내려 앉을 땅이 보이지 않는 대해를 지나가야 하는데요. 이 말은 태평양에 진입하는 순간부터는 잠을 자지 않고, 먹이도 먹지 못한 채 수 일을 비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뒷부리도요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도요새들은 온 몸을 불사르는 목숨을 건 비행을 일년에 두 번씩 해야 하는데요. 이들에게 한국은 아주 중요한 땅입니다.

왜냐하면요. 한국이 태평앙을 오가는 도요새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먹이 공급처이자 휴식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한국의 갯벌과 강 하구가 공사나 환경오염 등으로 훼손된다면, 도요새들은 충분히 먹이를 먹거나 쉬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도요새들의 생존에 치명적인 악영향이 발생하게 됩니다.

한국을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도요새들이 약 56여종이고, 그 숫자로 따지면 약 80만 마리인데요. 이런 점에서 한국은 도요새들에게 아주 중요한 생명의 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생명들까지 범위를 넓혀 본다면 한국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종류의 동식물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거대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한 영역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일원으로서 이 땅의 다른 생명들과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시야를 인류가 만들어 놓은 인공적인 공간과 관계에만 두지 말고, 적어도 한반도에서 우리와 공존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생명에게 우리의 시선을 돌리고 그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창세기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오늘 창세기의 말씀은 인간 창조에 관하여 말합니다. 이 본문은 여러 층위의 복잡한 자료들이 녹아있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만큼 아주 중요한 신학적 논증의 결과물들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오늘 창세기 말씀은 인간의 역사, 교회의 역사에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이끌어낸 복잡한 해석의 역사를 가진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복잡한 본문에서 하나의 이야기에 주목했습니다. 그것은 인간 창조의 목적입니다. 오늘 말씀 26절에서는 인간 창조의 목적이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27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와 같은 묘사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생명체를 다스릴 권한을 위임 받은 존재라는 당위성을 강화하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과 명분 속에 창조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첫 말씀은 28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다섯개의 명령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생육하라(פרו, 페루)’, ‘번성하라(ורבו, 우레부)’, ‘땅에 충만하라(ומלאו, 우밀아우)’, ‘땅을 정복하라(וכבשה, 베치브슈하)’,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ורדו, 우레두)’입니다. 이 명령들은 마지막 명령인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순차적인 배열로 볼 수 있는데요.

인간이 생육을 통해 번성하게 되고, 번성의 결과로 땅에 충만하게 되며, 인간이 땅에 충만해지면 땅을 정복할 수 있고, 인간이 땅을 정복한 결과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 있다는 도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의 구조 또한 창세기가 말하는 인간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생물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하시기 위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이와 같은 도식의 이야기는 왕의 대관식과 연관되는데요. 구약성서도 고대 근동의 세계관에서 기록된 문서이기 때문에 현대의 독자들인 우리는 일차적으로 오늘 말씀을 고대 근동의 세계관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 말씀은 신에 의해서 합당한 통치권을 부여받는 고대 근동의 왕권 강화 이야기의 형식이라는 것을 염두할 필요가 있습니다.[1] 그러나 오늘 말씀이 고대 근동 지역의 통치권 위임 문학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보통 고대 근동 지역의 통치권 위임 이야기는 이미 인간 세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특정한 왕의 왕권을 옹호하고 그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오늘 창세기 본문은 한 명의 특정한 왕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모든 생명을 향한 통치권이 공동으로 위임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즉 땅 위에 모든 생명에 대한 통치권이 남성과 여성에게 공동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은 하나님의 뜻이 고대 근동의 주류 문화였던 가부장제를 초월하는 것으로 읽히는 순간입니다.

특히 27절을 보면 이러한 의미가 더 확실해집니다. 27절에서 남성과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가 의미심장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 히브리어 본문에서 남성(איש, 이쉬)과 여성(אשה, 이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는 인격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단어들입니다(창 2:23 참조).[2]

그러나 오늘 본문인 27절의 남성과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는 그렇지 않습니다.[3] 남성(זכר, 자하르)으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기억되는 존재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는 남성으로 가문이 이어지고 기억되는 당시 사회의 가부장제 문화가 물씬 풍기는 단어입니다. 반면 여성(נקבה, 네케바)으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여성의 성적인 신체 특수성을 반영하는 단어입니다.

이처럼 오늘 말씀은 남성과 여성이 사회적으로 확연히 다른 층위의 존재라는 의미를 노골적으로 담고 있는 단어들을 사용한 뒤에 하나님께서 이 두 존재의 차이를 해체하시고, 이 두 존재에게 모든 생명에 대한 통치권을 함께 주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당시 고대 근동 사회의 가부장제에 기반한 가치관을 전복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 말씀은 제국의 폭력적인 힘이 질서의 기준이 되던 시대에 도전하는 말씀으로도 읽힙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살펴봤듯이 28절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 위의 모든 생명을 향한 통치권을 부여하셨습니다. 이때 아무래도 우리 시선을 끄는 표현은 ‘땅을 정복하라’와 ‘모든 생물을 다르려라’일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표현에서 제국주의적인 의미나 폭력적인 힘을 연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정복하라(וכבשה, 베치브슈하)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경우 폭력적인 힘과 연관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4] 반면 다스려라(ורדו, 우레두)로 번역된 단어의 히브리어는 폭력적인 힘과의 연관성이 적습니다.[5] 그렇다면 두 단어가 공존하는 문맥이 의미하는 것은 제국주의적이거나 폭력적이기만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을 모든 것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압도적인 힘과 권위를 가진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창조하신 뒤에 인간에게 자신의 힘과 권위를 부여했다는 맥락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8절의 말씀은 제국주의적이거나 폭력적인 힘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창조세계와 그 안의 생명들을 폭력적인 힘으로 정복하고 다스리는 대상이 아니라 감탄의 대상으로 보고 있음을 말합니다(창 1:31).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생명을 향한 통치권을 위임받은 존재인 인간 또한 창조세계와 그 안의 생명들을 향한 하나님의 시각과 다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기독교의 토양에서 형성된 유럽에서 중세까지는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신비가 담긴 유기체로 보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가 일어납니다. 베이컨이나 데카르트 같은 사상가들이 주도한 근대 과학 혁명 시기에 오늘 말씀은 인간 중심주의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해석되기 시작했습니다.[6]

이런 흐름속에서 당시 학자들은 자연을 영혼이 없는 ‘거대한 기계’로 보기 시작했고, 창조세계를 향한 약탈적 정복의 정당화를 주장했습니다.[7] 창조세계에 대한 이러한 인식 변화는 유럽에 이어서 미국이 패권을 누리는 수백 년의 기간 동안 전 지구에 큰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분명 이러한 사고는 거대한 자연 앞에선 인류가 한계를 넘어서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이 됐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는 찬란하고 편리한 일상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은 창세기의 말씀 왜곡한 덕분에 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편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성서를 탄생시키고 해석공동체로 성서를 보존해온 역사의 일원인 만큼 성서를 통해 전승된 가르침을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다시 읽어내고, 이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점검하고 정비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성서를 꼼꼼히 읽어내고 그 결과물을 신앙고백적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창세기의 말씀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생명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위임받은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통치권은 폭력으로 다스리는 것, 지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세계와 그 안의 생명들을 폭력으로 다스리는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으셨고, 찬사의 대상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현대인인 우리는 다스린다는 단어에서 힘의 위계와 폭력성을 먼저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마가복음서는 예수님을 통해 규정된 다스림의 개념을 들려줍니다. 마가복음서 10장 42-44절에서 예수님은 전복적인 다스림의 개념을 말씀하십니다.[8]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새롭게 탄생한 공동체 안에서 다스리는 것이란 사람을 내리누르고, 세도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공동체에서 큰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타인을 섬기는 것,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인류 역사에서 보편적인 다스림의 개념을 뒤집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오늘 창세기의 본문이 말하는 모든 생명을 다스리라는 명령이 힘으로 지배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창세기 본문이 말하는 모든 생명을 다스리라는 말씀을 읽을 때, 다스린다는 말의 의미를 섬겨야 한다는 것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이 말씀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살아내는 길은 어렵습니다. 성서가 전하는 대부분의 하나님 말씀은 나의 이익이나 나의 욕망 또는 나의 습관과 대척점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성서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도록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이 오늘 누가복음서 12장의 말씀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서 말씀은 초기 교회의 역사적 환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유대교 안에서 탄생하고 있던 초기 교회가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갈등과 긴장을 경험하고 있었고, 동시에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으로부터 오해 받거나 혐오와 사회적 차별적인 시선을 받는 일이 점차 발생하는 상황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인 초기 교회를 향해서 누가복음서는 어떤 상황이 닥쳐온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초기 교회가 마주한 상황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새로 탄생한 공동체가 기존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갈등과 긴장을 겪고, 이로 인해서 사회적인 차별과 혐오적인 시선을 받는 것은 상당한 위험 요인입니다. 생계에 위협이 생기거나 지역 공동체로부터 축출될 위험까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누가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음을 먼저 전합니다. 이때 친구라는 말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공동체 사이의 결속을 강조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은 예수님과 결속된 공동체 곧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일로 인하여 겪는 위협과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로움을 잊지 않으시고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9] 그리고 이 일의 모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추구하는 일로 인하여 겪어야 했던 어려움의 결과는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살아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시며 예수님이야말로 참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공관복음서의 공통된 목소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누가복음서의 말씀은 예수님을 기억하는 공동체를 향하여 예수님을 통해 드러낸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어떤 위협이나 불이익이 있다고 하더라도 더 중요한 것은 예수 따름의 길,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니 이러한 삶을 살아가려고 결심할 때 또는 실제로 그 삶을 살아갈 때, 예상되거나 경험하게 되는 위험과 불이익 넘어 있는 예수 따름의 가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바라보고 용기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예수 따름의 길, 기독교 신앙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매순간의 가치판단입니다. ‘내가 선택하는 이 선택이 나에게 이득인가 아닌가’의 판단이 아니라 ‘이것이 예수 따름에 합당한 길인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인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창조세계의 모든 생명을 다스리는 존재임을 환기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해야 할 다스림이란 지배가 아니라 예수께서 알려주신 것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비춰 본 오늘 창세기의 말씀은 우리가 모든 생명을 섬기는 존재로 지음 받았고,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모든 생명을 섬기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의 서두에 말씀드린 뒷부리도요새를 말씀드렸는데요. 다시 도요새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가 모든 생명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관한 생각을 나눴으면 합니다.

2000년대에 우리나라 서해에서는 새만금간척사업이 시작됐습니다. 그때 기억을 떠올려보면 새만금간척사업으로 생기는 토지로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다수의 이야기와 이 일로 인해 생길 환경 파괴에 관한 외로운 목소리들이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새만금간척사업은 도요새들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 사업이 시작되면서 도요새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수만 년 동안 우리나라 서해안을 찾아오던 도요새류 수십만 마리 중에서 20만 마리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붉은어깨도요라는 새는 약 9만 마리가 사라졌는데요.[10] 이는 당시 지구상에 존재하던 붉은어깨도요 전체 숫자의 93%에 달합니다. 그 결과 붉은어깨도요는 지구상에서 절멸위기에 놓이게 됐습니다.[11]

여러분 이와 같은 일이 우리나라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면 그것을 용납한다면, 이런 일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외면하거나 나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찬성한다면 우리는 과연 예수 따름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창조절기를 보내는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우리 삶의 방향을 점검하게 합니다. 오늘 말씀을 따르는 삶은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든 생명을 섬기는 삶을 위해 이 땅에 온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창조 목적이고, 우리가 그 삶을 살아내는 것이 예수 따름의 길과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해도 이를 위해서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키고, 현재 누리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 신앙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말씀을 따라서 두려워하지 말고 어려움과 불이익을 택하는 길을 걷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든 생명을 섬기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오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삶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지금의 우리 삶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무엇을 포기하고, 어떤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말씀 앞에서 제가 마주했던 고민을 여러분 앞에 내어놓습니다.

우리가 모든 생명을 섬기는 존재라는 오늘 말씀을 예수 따름의 길, 하나님 나라의일로 진지하게 여긴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적인 회개를 통한 과감한 결단과 실천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생명사랑교회의 이름으로 모인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삶으로 품고 함께 풀어갈 수 있는 예수 따름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 강승일 역, “함무라비 법전 서문,” 제임스 B. 프리처드 편, 『고대 근동 문학 선집』, 고대 근동 시리즈 13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6), Col. I: 1–49; 강승일 역, “함무라비 법전 서문,” Col. I: 1–49; 김구원 역, “메리카레 왕을 위한 지침,” Lines 130–135; 윤성덕 역, “투트모세 3세 승전비,” Lines 1–12; 김성천 역, “아시리아 서신 (에사르하돈),” SAA 10 207: Rev. Line 9; 주원준 역, “툭쿨티-니누르타 서사시,” Col. I: 15–25.
[2] 남성(איש, 이쉬): 인격적 개별자, 남편, 사람을 의미(약 2100회 등장). 여성(אשה, 이샤): 인격적 동반자, 아내, 여자를 의미(약 780회 등장).
[3] 남성(זכר, 자하르): 생물학적 남성 또는 수컷을 의미, 단어의 어근은 기억되는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가부장적인 의미의 단어(약 80회 등장). 여성(נקבה, 네케바): 여성의 신체적·생물학적 차이를 직관적으로 반영하고 있음. 특정한 신체적 구조(구멍/오목함)를 가진 존재라는 단어. 이 단어의 어원은 어근의 의미는 ‘뚫다’, ‘구멍을 내다’, ‘찌르다’이다(약 20회 등장).
[4] Ludwig Koehler and Walter Baumgartner,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trans. M. E. J. Richardson, study ed., vol. 1 (Leiden: E. J. Brill, 2001), s.v. “כבש.” 복종시키다, 폭력을 행하다, 모욕주다.
[5] Ludwig Koehler and Walter Baumgartner,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trans. M. E. J. Richardson, study ed., vol. 2 (Leiden: E. J. Brill, 2001), s.v. “רדה.” 이끌어 내다. 길을 이끌다.
[6] 프랜시스 베이컨/ 진석용 옮김,『신기관: 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 지배에 관한 잠언』, (서울: 한길사, 2001), 제1권, 잠언 129; 르네 데카르트/ 최명관 옮김. 『데카르트 연구: 방법서설·성찰』, (서울: 창, 2010), 122-37.
[7] 베이컨은 자신의 저서 『신기관』에서 “인간은 지식을 통해 자연을 구속하고 인간의 유익을 위해 복종시켜야 한다”고 주장 함. 이때 창 1:28이 ‘자연을 인간 마음대로 변형하고 착취해도 된다’는 신성한 권리처럼 인용됨.
[8] “4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44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막 10:42-44)
[9] 말 3:16-17; 시 34:15, 112:6; 마카비하 7:9, 7:14, 12:43-45.
[10] 김지숙, “새만금공항 대체서식지 실효성 없어…세계 최대 철새 경로 단절,” 『한겨레』, 2026년 7월 8일, https://www.hani.co.kr/arti/animalpeople/human_animal/1267197.html (검색일: 2026년 9월 12일).
[11] 지구의 벗 환경운동연합 블로그, “[회원대회_새만금은 도요새가 그리워] 60억 인구중 20억이 사라진다면?,” 『지구의 벗 환경운동연합 블로그』, 2020년 7월 8일, https://m.blog.naver.com/kfemblog/222024887357 (검색일: 2026년 9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