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현 목사] 호사비오리의 눈으로 성서읽기 – 2026년 06월 07일
누가복음서 3장 7-9절
오늘은 성령강림 둘째주일이자 환경주일입니다. 이날을 맞아서 제가 성도님들과 함께 성서 말씀을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희가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 우리교회의 유아유치부와 어린이부는 물 맑고, 공기 좋고, 푸른 녹음이 짙으며, 각종 야생동물과 풀벌레 소리가 생생한 양평에서 성경학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의 소중한 어린이들이 다양한 생명력이 넘치는 양평의 숲에서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더듬어 알아가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함께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나누기에 앞서 사진을 감상해보고자 합니다. 이 사진은 제가 지난 겨울에 찍은 사진들입니다. 저는 탐조 즉 야생에 있는 새를 관찰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는데요.[1] 지난 겨울에 틈틈이 새를 만나러 다니면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이 사진을 설명하자면, 왼쪽 상단에 있는 새는 큰소쩍새입니다. 그리고 시계방향으로 개리, 호사비오리, 재두루미입니다. 이 새들은 국내외적으로 멸종위기 야생생물에 해당하는 보호종들입니다. 이 새들을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성도님들께서는 이 새들을 보지 못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님들께서 주로 서울이나 도심지에 사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주 단순한 이유인데요. 성도님들께서는 저만큼 새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래야 할 이유는 없으시죠. 이건 취향의 문제니까요. 그러나 만약 성도님들께서 저처럼 새에게 관심을 가지신다면 제가 만난 이 새들을 성도님들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새들은 모두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새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님들께서 이 새들을 만나게 된다면 저처럼 이들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이들에게 깃든 하나님의 손길에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새들 중에서 한 친구를 특별히 더 주목하고자 합니다. 바로 오른쪽 하단에 있는 친구인데요. 이 새의 이름은 호사비오리입니다. 이 새는 여름에는 중국 아무르강, 러시아의 우수리강 그리고 백두산 골짜기의 계곡에 머물면서 번식하고, 겨울이 되면 우리나라와 일본 그리고 중국 남부로 이동해서 겨울을 납니다.
이 새는 현재 약 2,500-4,500마리 정도가 지구상에 남아 있다고 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 친구들은 몇몇 주요 서식지나 도래지에 환경파괴나 갑작스러운 생태적인 변화가 일어날 경우 지구상에서 멸종될 우려가 아주 높습니다.[2]
그런 의미에서 매 겨울 우리나라에 약 100-200여 마리가 찾아오는 호사비오리는 아주 귀한 손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슬픈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호사비오리를 저는 어디서 만났을까요? 저는 호사비오리를 우리교회로부터 상당히 가까운 장소에서 만났는데요.
올해 2월 설 연휴에 월계역과 광운대역 사이의 중랑천에서 만났습니다. 이때 사진에 보이는 수컷 한 마리와 암컷 두 마리 총 세 마리를 봤습니다. 호사비오리는 매년 같은 장소를 찾아서 겨울을 지내는 만큼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내년 겨울에 중랑천을 산책하실 때 호사비오리를 찾아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만난 호사비오리 무리가 올 여름을 백두산 일대에서 건강하게 잘 보내고, 중랑천이 지금의 환경을 유지한다면, 이들은 분명 올 겨울에도 도봉산역에서 신이문역 사이의 중랑천에서 겨울을 지내러 올 것입니다.
이 시간 성도님들에게 낯선 존재인 호사비오리를 오래 이야기한 이유는 제가 오늘 성서 말씀을 호사비오리의 입장에서 읽어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서를 호사비오리의 입장에서 읽는다는 생각이 너무 낯설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교회의 입장 또는 나 개인의 입장에서만 읽는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서가 나 개인이나 교회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비기독교인을 비롯한 모든 인류와 나아가 우리와 함께 창조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뜻도 분명하게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저는 오늘 말씀을 호사비오리 또는 호사비오리로 대표되는 우리와 동등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나눠 가진 존재들, 곧 인간 이외의 생명들의 입장에서 읽어 보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오늘의 본문이 역사적으로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의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일화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서 회개 운동을 펼친 사람입니다. 신약성서와 동시대의 유대 문헌을 살펴보면 세례자 요한은 유대 지역에서 유명한 인물이었고, 그가 펼친 세례와 회개 운동은 유대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활동은 당시 시대상을 살펴볼 수 있는 지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이 펼친 세례와 회개 운동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요한의 세례와 회개 운동의 저변에는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하던 유대사람들의 열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때 유대사람들이 로마 제국의 통치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원한다는 것은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열망입니다. 이 말은 곧 통치 체제의 대전환이라는 위험한 열망입니다.
이것이 왜 위험한 열망일까요? 그 이유는 로마 제국의 힘과 그들의 통치 방법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의 힘은 당시 지중해 문명에서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강력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자신들에게 반기를 드는 민족이나 도시나 나라를 처참하게 짓밟아 뭉개 버리는 통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대사람들은 왜 이렇게 위험한 열망인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갈망했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선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봐야 합니다.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보면, 대다수 유대사람들은 로마의 압제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던 종교 지도자들의 체제 아래서 신음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이 현상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유대 지역을 정복한 이래 수백 년에 걸쳐서 진행되어 온 식민지배 역사가 누적된 결과였습니다. 유대 민족은 이런 현실을 한탄하며 하나님이 보내는 구원자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길 오래도록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요원했고, 이런 상황에서 유대 민중에게 오래도록 가해진 경제적인 수탈과 여러 신도시 건설에 동원되던 부역의 짐은 유대 민중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큰 문제였습니다.[3]
그렇다보니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했던 유대 민중은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토지를 팔아야 하는 일이나 빚을 지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고,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경우엔 가족을 노예로 팔아야 하는 경우도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은 구약성서에서 금하는 일들이었습니다.[4]
이렇게 처참한 상황에서 유대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고, 위로해야 할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층들은 동족들의 고난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하거나 민중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들만의 주장을 앞세우곤 했습니다.
이들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면, 우선 제사장 집단은 로마 제국의 권력자들과 연을 대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엔 예루살렘 성전의 최고 권력인 대제사장은 로마 황제가 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 집단은 성전내에서 권력 다툼을 위해서 애썼을 뿐 민중들의 삶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먹고 살만한 계층이던 율법학자 및 사회 지도층들 중에서는 로마의 권력에 소극적이나마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로마의 지배를 못 마땅하게 여기면서 유대인 답게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들은 당시 제사장들과는 달리 구약성서의 율법을 잘 준수하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펼쳤는데요.
그 이유는 자신들이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는 민족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로마를 물리치시고, 유대 민족의 독립을 이루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유대 종말론적인 희망은 로마의 거대한 힘을 뒤엎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생각은 당시 유대사람들에게도 귀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일정 부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말씀하신 것을 복음서에 확인 할 수 있습니다.[5] 그러나 이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구약성서의 율법을 잘 준수하기 위해 만든 시행령들은 노동자계층이 아닌 사람들만 지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준수에 관한 과도한 열정으로 인하여 율법의 정신을 담아내지 못하는 시행령들을 만들었고, 이 시행령을 준수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일상을 위해 매일 육체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던 사회 지도층과 율법학자들만이 가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시행령을 유대 민중들에게 요구하면서 그것을 지킬 수 없었던 유대 민중에게 열패감과 죄의식을 심어주었고, 동시에 자신들은 종교적 우월감에 취하는 비극을 빚어냈습니다.[6]
결국 율법학자들은 유대사람들을 돌보고 위로하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일에 실패했고, 그 결과 자신들이 꿈꾸던 대로 유대 민족이 율법을 잘 준수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길 희망하던 일에도 실패했습니다.
이렇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 모두 처참하게 실패한 유대 민족의 상황에서 요한은 세례와 회개 운동을 통한 회복을 꿈꿨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서를 살펴보면 요한은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상기하고, 현재 삶의 모습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향한 삶으로 조속히 돌이킬 것을 요청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눅 3:18 요청하다, παρακαλέω).
그런데 요한이 유대 민족에게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을 요청했다고 말하기에는 오늘 말씀 속 요한의 어투가 상당히 공격적으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은 요한의 일갈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눅 3:7).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를 향해서 외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요한의 일갈은 매섭습니다. 특히 “독사의 자식들아!” 라는 말에는 혐오의 감정이 다분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요한은 왜 불특정 다수인 무리를 향해서 날선 비판을 가할까요?
오늘 본문과 평행본문인 마태복음을 보면 요한의 일갈은 특정 대상을 향하고 있습니다(마 3:7). 그들은 사두개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중심이었던 바라새파입니다. 이들에게 요한이 독설을 날리는 것은 앞서 살펴본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이해됩니다.
이들은 유대 민족을 돌보고 위로해야 하는 책무를 맡은 자들이지만 그렇지 못했고, 두 집단 모두 유대 민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을 했기 때문에 이들을 향한 요한의 일갈은 타당합니다.[7]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서에서 요한은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채 무리를 향해서 일갈합니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저는 누가복음서에서 요한이 무리를 향해 일갈한 것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마태복음보다 더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렸듯이 분명 유대 민중은 지도층으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그들 때문에 더욱 피폐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당시 유대 민중도 로마라는 제국의 체제 아래에서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유대 민중이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원해서 그랬다기 보다는 식민지배라는 구조적인 상황에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그래서 피해자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유대 민중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연대와 공존의 정신을 따르기 보다는 당시의 지배 문명인 로마의 법칙을 따라서 적자생존의 투쟁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로마의 질서를 따라서 힘이 있는 자들에게 줄 서기 바쁘고, 뒤쳐지는 이웃의 형제와 자매를 돌보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돌보는 삶을 치열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한 당시 유일한 성서인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연대와 공존의 가치를 저버리는 것이었습니다.[8]
곧 하나님의 계약 백성으로서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모두를 향해서 일갈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뒤에 이어지는 11-14절의 세부적인 윤리 지침들이 이 사실을 뒷받침 합니다.
살펴본 바에 따르면 마지막 예언자(눅 16:16; 마 11:13)인 요한이 모두를 향해 외친 일갈은 정당합니다. 요한은 예언자로서 자신의 시대에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할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유대 민족이 갈망하던 하나님의 통치의 때를 준비하게 하기 위한 경고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개의 열매를 맺을 것을 강조합니다(눅 3:8). 왜냐하면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체제는 당시 유대사람들이 굳게 믿고 있었던 것처럼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다가오는 예수님의 등장과 더불어 동터오는 하나님의 통치체제에 합당한 행위를 열매로 맺으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이자, 구약성서의 가르침인 연대와 공존의 삶으로의 조속한 전환입니다.[9] 환언하면 로마의 힘과 폭력의 지배체제에서 빠져나올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종말의 때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즉 예수님을 맞이하여 새로운 시작에 동참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시급한 결단을 요구합니다(눅 3:9).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때에 관한 요한의 경고는 인간 사회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일까요?
오늘날 우리는 창조세계 전체가 거대한 전환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급박한 하나님의 때를 경고하며, 이때를 위하여 대대적인 삶의 전환을 요구하는 누가복음의 말씀은 호사비오리를 비롯한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들의 입장에서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호사비오리의 경우 매년 백두산과 한국 사이를 오가면서 점차 줄어드는 서식지와 도래지 그리고 높아지는 평균 기온과 급격한 기후 변화를 겪으며, 요한처럼 자연계에 드리우는 하나님의 때, 종말의 때를 우리 인류보다 더 잘 인식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만약 호사비오리가 인간의 언어를 말할 수 있다면 인류를 향해 세례자 요한처럼 외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 창조세계의 대전환이 가까이 왔다.” 라고 말이죠.
호사비오리들은 멸종위기에 처한 자신들의 현실을 증거로 닥쳐올 전지구적 생태 위기라는 진노를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성장의 이름으로 피할 수 있다고 믿는 우리에게 착각을 버리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인류의 만행에 따른 자연의 역습인 기상 이변과 폭염과 홍수 그리고 코로나19와 같이 새롭게 나타나게 될 병원균과 바이러스에 의한 역병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외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러한 자연의 역습으로 가난한 자들과 각종 취약계층부터 먼저 희생당할 것인데, 그들의 희생은 결국 풍요라는 책임 없는 쾌락을 누리며 창조세계를 파괴한 이들에게 죄값으로 돌아갈 것임을 고발할 것입니다.
이렇게 예언자처럼 외칠 호사비오리의 눈에 비친 인간 세상은 어떨까요? 한정된 공간과 자원을 가진 창조세계를 아랑곳 하지 않고, 끝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며 성장을 추구하고,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통한 거짓된 번영을 약속하는 모습! 곧 모두의 종말을 향해 질주하는 폭주기관차 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인류는 자신이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 속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살아 온지 오래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세계를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주어진 자원과 소유물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창조세계를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생명들의 안녕과 생존을 뒤로 미뤄 두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은 세례자 요한 당시의 로마 제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로마는 힘과 폭력의 논리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질서에 길들여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로마의 군사력에 의한 지배 논리 대신 기술과 자본, 소비와 성장의 논리 속에 길들여진 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질서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시대 역시 또 다른 제국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 중심의 제국주의에 길들여진 우리 인류의 모습은 어떤가요?
우리는 우리의 편리함을 위해 사용되는 수많은 에너지와 자원, 그리고 생산과 소비의 결과가 다른 생명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는 사실에는 무감각합니다.
우리의 안락함을 위해 어떤 생명은 삶의 터전을 잃고, 어떤 생명은 새끼를 잃고, 어떤 종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생명의 피 흘림보다 나의 불편함이 해소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고, 더 많은 물건을 만들고, 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 더 많은 것을 쉽게 버립니다. 이러한 인류의 삶의 방식은 지구상에 겨우 몇 천 마리밖에 남지 않은 호사비오리와 같은 존재들에게 더욱 빠른 종말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호사비오리만의 종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서로 연결된 생명의 그물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생명이 사라지는 일은 결국 모든 생명에게 영향을 미치고, 창조세계의 붕괴는 도미노 현상으로 일어날 것이며, 결국엔 인간에게도 차례가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위험을 멸종위기의 새들을 관찰하면서 자주 느낍니다.
특히 저는 여러 해 동안 매년 같은 장소에서 주기적으로 철새들을 관찰하면서 작년에 본 종이 보이지 않거나, 어떤 종이 작년에 온 숫자보다 훨씬 적은 숫자가 찾아오는 것을 목격하면 스산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현실 앞에서 오늘 요한의 급진적인 회개의 요청을 생태적인 관점에서 읽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고 이를 여러분과 나누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시도한 것처럼 호사비오리의 눈으로 성서 읽기를 시도한 것은 우리를 둘러싼 창조세계의 생명들이 들려주는 종말의 서곡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에게 들려오는 것은 단지 파멸의 경고만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 하나님의 통치를 준비하는 초대였듯이, 창조세계의 탄식 또한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 연대와 공존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초대인 것입니다. 이 초대에 함께 응할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어떨까요?
그래서 거대한 기업과 국가가 움직이지 않고,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좌절하거나 회의에 빠지지 말고, 우리는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우선 시급하게 생태적인 회개의 요청을 받아들인 사람에 걸맞는 삶의 변화를 살아내면 어떨까요?
이것이 세례자 요한이 외친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는 음성을 생태적 차원에서 듣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요?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나눈 우리는 이제부터 함께 마음과 발을 맞추어 창조세계와의 연대와 공존의 삶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며, 그 길로 나아갑시다. 창조세계의 다른 생명들을 통해서 외치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입시다.
그래서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급진적으로 선택하고, 실천적으로 살아내기 위해 좌충우돌하며 애쓰는 생명사랑공동체가 되길 기원드립니다. 이런 우리의 결단과 용기 위에 우리 주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실 것 입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3] 당시 평범한 대다수의 유대사람들은 로마의 식민지인으로서 로마에게 각종 직접세와 간접세를 내야 했고, 유대인으로서 마땅히 십일조와 성전세를 내야 했다. 유대 민족은 로마에게 직접세로 연 소득의 약 25% 수준을 지불해야 했고, 십일조와 성전세로는 연 소득의 10-20%정도, 그리고 각종 간접세를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이렇다 보니 당시 유대 사람들은 평균 소득에서 약 40-50%를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여기에 더해서 유대 민중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다른 요인은 로마 제국에 아부하던 유대 지도자들이 실시한 대규모 신도시 공사들이었다. 신도시 공사에 동원된 대다수의 농민들은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돌보지 못한 토지는 황폐해져서 이중으로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당시엔 지금과 같은 사회 안전망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기적으로 내야 했던 막대한 세금은 유대 민중의 삶을 옥죄었다.
[4] 레 25:23, 39; 신 15:1-2; 출 21:2-3 참조.
[5] 마 22:21, 26:52; 막 12:17; 눅 20:25
[6] 마 23:4-7, 13; 막 12:38-40; 눅 11:46, 52
[7] 귀족 계층이자 제사장 집단과 연관이 깊은 사두개파는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했고, 바리새파는 자신들의 종교적 우월감을 뽐내느라 유대 민중의 삶을 돌보지 못했다.
[8] 창 2:15, 9:9-10, 12-17; 출 22:21, 23:6, 12 레 19:9-10, 33-34, 25:2-7, 23, 35; 신 5:14, 10:18-19, 15:7-11, 22:6-7, 24:17-22, 25:4; 잠 12:10; 시 104편, 146:9; 사 1:17, 2:4, 11:6-9; 렘 22:3; 겔 18:7-8; 암 5:24; 슥 7:9-10; 호 2:8 등 참조.
[9] 마 5:9, 23-24, 39, 44, 6:2-4, 14-15, 7:12, 6:27-29, 35, 9:10-13, 18:5, 12-14, 19:21, 21-22, 20:25-28, 22:39, 25:35-40; 막 2:15-17, 9:35, 37, 10:21, 42-45, 12:31; 눅 5:29-32, 6:20, 21, 27-29, 31, 35, 9:48, 10:5, 27, 10:25-37, 12:15, 14:13-14, 15:3-7, 18:22 등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