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황은영 목사]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2026년 10월 11일

시 70편 1-5절, 사도행전 8장 8-13, 18-24절

오늘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Michael Sandel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모든 것이 돈으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장주의적인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가치가 위협받는지를 비판합니다. 돈은 서로 다른 것들의 가치를 숫자로 측정하고 비교하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얼마면 됩니까?”라고 물을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돈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순간, 오히려 그 가치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Sandel은 교육과 가족, 시민적 의무 등의 문제를 통해 이러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교육이 완전히 돈 놓고 돈 먹기 식으로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요. 얼마나 투자해서 얼마나 벌 수 있는가만이 기준이 된다면, 교육은 인간을 도야하는 일이 아니라 수익을 얻기 위한 투자가 됩니다. 결혼을 위한 만남에서도 사람의 조건을 등급으로 수치화한다면, 사람 자체가 교환할 수 있는 조건들의 묶음으로 다루어집니다. 군복무 대신 돈을 납부하면 된다는 식으로 바뀐다면, 함께 감당해야 할 시민적 의무도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교육을 통해 우리는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배우고, 그 가치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 도야됩니다. 가정에서는 내가 준 만큼 돌려받는 교환을 넘어서는 희생과 사랑을 배웁니다. 시민적 의무를 통해서는 자신의 이익을 넘어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배웁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비용과 이익은 계산할 수 있겠지만, 그 속에서 배워야 할 삶의 가치는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어떠할까요. 제가 좋아하는 비틀즈의 노래 가운데 「Can’t Buy Me Love」가 있습니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는 없다는 노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돈으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돈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가 구하는 것, 자녀의 학업 성취나, 건강이나, 매매의 성공이나, 혹은 취업이나, 이직이나,  심지어 건강 마져도, 만일 치료 가능하다면, 이 모든 것들에 만일 상응할 수 있는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때 우리는 얼마나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것을 구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마음,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평화, 어려움 속에서 참아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선한 태도, 올곧은 삶의 원칙, 쾌락을 통제할 수 있는 절제력, 우정, 정의감, 연대의 마음, 이런 것들, 사람들이 허황되다가 여기는 그러한 삶의 가치들을 우리가 얼마나 구하고 있을까요. 우리 안의 어떤 것들이 그것을 구하지 못하게 합니까.

오늘 시편 70편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의 힘을 간구하는 노래입니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고, 그의 재난을 기뻐하며 조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인은 그 가운데서 요청합니다. 하나님, 빨리 저를 건져주십시오. 주님, 빨리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 짧은 시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급한 구원의 요청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정말 그렇게 빨리 문제를 해결해주십니까.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것은 대개 상황이 당장 해결되는 것보다,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전환됨으로써 문제가 다르게 해결되는 일입니다. 나를 괴롭게 하던 상황이 그대로인데도 마음이 달라집니다. 그 상황에 붙들려 자신을 잃어버리던 사람이, 그 가운데서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다시 붙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주시고 도와주신다는 것은 그러한 방식으로도 일어납니다.

현대의 신앙은 상황을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간증으로 넘쳐납니다. 기도했더니 일이 이루어지고, 막혔던 길이 열리고, 원하던 것을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돈이 되기도 합니다.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을 바꾸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약속에 이끌립니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일이 되는 것은 아니고, 기도하지 않는다고 일이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서도 무당에게 기도하건 부처에게 기도하건 산신에게 기도하건 혹은 기도하지 않건, 될일이 안되고 안되는 일이 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도 일이 안 될 수 있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일이 잘될 수 있습니다.

기도가 만드는 차이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 차이는 어떤 상황이 닥치든 간에 이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이고 또한 삶에서 이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일이 잘될 때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 자만하기 쉽습니다. 일이 안 될 때 자신의 실패가 삶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느끼면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일이 잘될 때 겸허하게 되고, 일이 안 될 때에도 그것을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을 넘어서는 분 앞에 삶을 내려놓으며, 내가 얻은 것과 얻지 못한 것이 나의 삶의 가치를 온전히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도가 필요할까요. 내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내어놓을 마음을 준비하는 기도입니다. 나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어야만 이웃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상황 가운데서도 마음을 열고 삶을 조금 내어놓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는 응답이 빠릅니다. 상황 전체가 바뀌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이 전환되고 살아갈 방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을 조소하는 사람들이 수치를 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를 우리의 신앙에 가져올 때, 자기의 적을 망신당하게 해달라는 요청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나와 다른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무시하고 경멸하며 하찮게 보는 나의 삶의 가치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받아들이게 되기를 바라는 바라는 기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삶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게임에서 성공했다고 그 과실을 물욕과 허영과 쾌락으로 마음껏 음미할 수 없게 됩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슬픔과 좌절에 온전히 몰입할 수도 없게 됩니다. 자신의 앞에 도움을 요구하는 이웃이 들어오고, 자신의 것을 나누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 게임의 규칙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규칙, 이기지 못하면 가치가 없다는 규칙, 자신의 이익부터 확보해야 한다는 규칙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따라서 산다는 이유로 우리는 인생의 게임에 온전히 적합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한심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자기 인생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남의 일에 끼어드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그들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키려던 가치가 모두에게 인정되고, 우리를 조소하던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날은 쉽게 오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시편 4절의 기도가 중요해집니다. 주님을 찾으며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를 괴롭힌 사람들에게 보복해줄 힘센 아버지가 있다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은 영의 주님이시고 우리의 정신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순수해질수록, 무엇인가를 얻고 인정받고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데서 조금씩 벗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그 이유 자체로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여기며 기뻐하게 됩니다. 주님의 승리는 나의 삶의 참된 이유, 내가 지키며 살아가려는 참된 이상의 승리입니다. 사람들이 인정해주어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살아가는 그 이유가 참되기에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쌍하고 가난한 이 몸은 그 승리를 충분히 누리지 못합니다. 생활의 어려움이 있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고, 남의 시선에 상처받는 약함이 있습니다. 나를 조소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어느새 나 자신의 시선으로 가져옵니다. 그들의 기준으로 나를 판단하며 묻습니다. 나는 정말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닌가. 이렇게 살아서 무엇이 남았는가.

바로 그때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빨리 와주십시오. 저를 건져주시고 도와주십시오. 제가 바라보는 이상 가운데서 기뻐하도록, 그들의 시선으로 저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이것은 삶의 참된 이유를 다시 붙들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자괴감에 빠지지 않고 충만함과 평온 가운데 그 길을 걸어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성령의 권능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이러한 삶의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던 상황을 보여줍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닥쳤습니다. 흩어진 신자들은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빌립은 사마리아의 한 도성에서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오랜 종교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경계를 넘어 복음이 전해지고, 서로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의 신앙 공동체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몸에 장애가 있던 사람들과 악한 영에게 시달리던 사람들이 치유를 받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질병의 치유만이 아닙니다. 손상된 삶이 회복되고, 주위 사람들이 그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삶이 다시 살아갈 만한 삶이 되고, 그것이 주변 사람들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 도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도성에는 마술사 시몬이 있었습니다. 그는 낮은 지위의 사람부터 높은 지위의 사람까지 모두에게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큰 능력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힘을 가진 사람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시몬을 오늘의 삶에 비추어보면,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가능성을 최대한 펼치고, 고유한 개성을 드러내며, 삶의 아름다운 경험들을 만끽하면서 주어진 상황에서 보통은 사람은 하기 힘든 어려운 어떤 위업들을 만들어내는 그러한 인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마술사였다는 점입니다. 마술은 결과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는 행동과 의식을 통해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는 시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능력을 경외하고 자신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탁월한 이의 위력에 감탄하고 따라간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의 손상된 삶을 회복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에서 마술의 능력에 대비되는 복음의 능력이 펼쳐집니다. 반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약함 속에서 새로운 삶과 강한 힘이 솟아난다는 복음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됩니다. 강하고 탁월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약하고 손상된 자신의 삶에서도 시작될 수 있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기쁜 소식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다스리시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례는 이전의 삶의 방식과 단절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 새로운 삶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과 그 능력이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표징이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빌립을 계속 따라다니며 표징과 기적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저 잠깐 관심을 보이다 떠난 것이 아닙니다. 계속 곁에 머물며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 구별됩니다.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정하는 것과, 그 삶에 온전히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 삶을 살겠다는 결심과 그 삶의 정신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입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의 안수를 받고 성령을 받습니다. 이를 우리의 삶에 연결해보면, 동일한 가치에 자신을 바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을 배우고 함께 참여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의 감화는 예수의 정신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드러납니다. 결단했던 새로운 삶이 이제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정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에게는 무엇이 보였습니까. 그에게 더 크게 드러난 것은 공동체 안의 권위였습니다. 그가 달라고 요청한 권능은 엑수시아, 곧 권한과 권위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게 하는 권한을 원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그것이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위세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술은 고객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당면한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해답을 제공하고, 어떤 행동을 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바치는 헌금까지도 그런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를 내놓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기대하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공동체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무엇을 원하며 살아야 하는가 자체가 달라진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릇된 욕망과 의미 없는 게임의 규칙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 삶을 함께 살아가며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시몬은 그러한 공동체까지 가지려고 했습니다. 어려움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나음을 얻고 새로운 삶을 기쁨으로 살아가는데, 그의 눈에는 사람들이 모이고 권력과 권위가 생기는 모습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 그가 얻고자 한 것은 공동체의 삶보다 그 공동체에 작용하는 힘이었습니다.

돈과 권력으로 사람들의 흐름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는 있습니다. 돈은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을 수치화한 것이고, 권력은 사회적 조직을 통해 그 힘을 증폭시키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러한 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부패를 이루는 핵심적인 두 축도 돈과 권력입니다. 더 많은 권력을 위해 돈이 필요하고, 더 많은 돈에 대한 재량권을 위해 권력이 필요합니다. 공동체를 위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사용할 힘을 늘리는 것이 중심이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예수와 함께 자신이 죽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 이웃을 위한 삶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은혜이고 은총입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기술과 힘을 확보한다고 그 삶이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돈으로 사람들을 모을 수 있고, 권력으로 따르게 할 수 있고, 뛰어난 능력으로 감탄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자기 힘으로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 공동체를 움직이는 생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자기 소유의 힘으로 바꾸려는 순간, 이미 그 선물이 지향하는 삶에서 벗어납니다.

베드로는 시몬이 쓰디쓴 악과 불의에 매여 있다고 진단합니다. 인정받지 못한 자신을 인정받게 하려는 마음,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주려는 마음, 다른 사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는 마음이 그 힘에 들어갑니다. 생존과 경쟁, 위신과 지배의 욕망이 신앙과 공동체까지 잡아먹는 것입니다.

시몬은 그 말이 자신에게 닥치지 않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먼저 드러나는 것은 마음을 바꾸려는 태도보다 닥칠 위험을 피하려는 태도입니다. 자신이 무엇에 붙들려 있는지 돌아보기보다, 종교를 통해 자신을 보존하려는 마음이 앞서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제 이야기를 하면서 남의 이야기처럼 하고 있습니다. 시몬을 설명하지만 사실 이러한 마음은 저에게도 있습니다. 신앙을 말하면서도 자신의 위신을 지키고 싶고, 공동체를 이야기하면서도 영향력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삶이 보존되고 확장되기를 바랍니다. 시몬은 멀리 있는 마술사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도 자신의 힘을 구하려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또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요청할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비틀거리고 정도에서 벗어나더라도 직언해주고 곁에서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이 바르지 않다고 말해주며, 그를 생각하고 기도해줄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힘을 키우는 관계와는 다른 관계가 그의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빌립과 요한, 베드로의 모습이 있습니다. 동시에 시몬의 모습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와 성령의 주어짐 사이, 그 중간 어디쯤에서 살아갑니다.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단했지만 그 정신으로 온전히 충만하지는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면서도 인정받고 싶고, 공동체를 섬기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도 누가 더 큰지를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사도, 곧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자신의 삶에 녹여내고 기쁨 가운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높이는 힘을 구하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지도록 기도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시몬이 있습니다. 내가 헌신했으니 그만큼 인정과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자신의 대가로 취득한 것으로 바꾸려 합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받았으면서도 다시 돈과 힘의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의 시몬이 사도가 되어가는 삶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 안의 시몬만이 우리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선물 안에서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충만해져서, 자신의 힘을 확대하는 삶에서 이웃을 위해 자신의 삶을 사용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구하고, 선물로 주어진 삶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권능을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