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영 목사] 오늘날 순교의 의미: 증언으로서의 삶 – 2026년 03월 15일
이사야서 59장 1–3, 9–21절, 요한복음서 19장 1–16절
오늘은 총회가 정한 순교자 기념 주일이자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순교를 생각하는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순교라는 말은 이제 우리에게 그리 익숙한 단어는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순교는 늘 함께해 온 종교적 현상이었습니다. 가까이로는 민주화 운동 속에서 삶을 희생한 기독인들이 있었고, 냉전 시기 이념 대립 속에서 죽음을 당한 기독인들도 있었습니다.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이들도 있었고, 천주교 전래 이후 조선 왕조의 쇄국 정책 속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순교는 기독교 역사와 늘 함께해 온 현상입니다.
2세기 교부인 터툴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억압 속에서도 자라나는 기독교를 설명하며 순교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 “우리가 당신들에게 잘려 나가는 만큼 우리는 늘어난다.
기독인의 피는 곧 씨앗이다.”
순교라는 영어 단어 martyrdom은 헬라어 **마르튀레인(martyrein)**에서 왔습니다. 그 뜻은 증언하다, 증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순교란 단순히 죽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이 믿어 온 가치와 믿음을 증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순교 혹은 증인이라는 개념은 매우 기이한 개념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허물어냄으로써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는 삶을 세우고, 그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교의 극단적인 모습은 죽음을 통해 자신의 믿음과 가치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는 단지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믿음을 증거하며 살아갈 때 그 또한 순교의 삶입니다.
하지만 그런 삶은 세상에서 그렇게 빛나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증언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어리석은 일로 보일 뿐입니다. 때로는 아무런 호응도 받지 못하는 작은 소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과 순교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보여 주는 삶의 모습은 바로 이런 증언의 삶, 곧 순교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이사야 본문은 바빌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 공동체가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반면 요한복음 본문은 그 도우심이 세상의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에 의해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이 두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의 두 측면을 보여 줍니다.
먼저 이사야가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의 가치를 삶으로 증언해야 하는 시련을 마주할 때 상황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고 기도합니다.
반면 요한복음이 보여 주는 모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죄를 자기 죄처럼 짊어진 그리스도를 따라, 종교와 정치 권력에 의해 박해받고 변두리로 밀려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의 시험을 받을 때, 우리는 먼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오는 새로운 가능성을 기다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가능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의 흐름에서 비껴가는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폭력적인 흐름 속에서 자기를 내려놓고 다른 이들을 위해 천천히 스러지는 삶 속에서 드러납니다.
이러한 순교의 삶은 흔히 생각하는 “바위처럼” 버티는 삶이라기보다 오히려 “소금 인형”의 삶에 가깝습니다.
바위처럼이라는 민중가요가 절망 속에서도 버티는 삶을 노래한다면, 안치환의 노래 **“소금 인형”**은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들어가 녹아 사라지는 삶을 노래합니다.
순교의 삶은 오히려 이 소금 인형의 삶과 더 가깝습니다.
물론 절망에 굴하지 않고 세상의 주춧돌이 되는 삶의 측면도 순교의 삶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필요한 것은 하늘에서 오는 사랑의 깊이에 자신을 맡기고 자신의 삶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내어 줄 때 비로소 우리는 바위처럼, 더 나은 미래의 주춧돌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상징입니다.
오늘 이사야 본문은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의 상황 속에서 쓰였습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칙령을 내려 포로들을 돌려보냈을 때, 돌아온 이들은 고향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귀환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미 가난한 땅이었고, 남아 있던 사람들과 귀환자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귀환자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했고, 토착민들은 그들을 경계했습니다. 이런 갈등은 이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공동체는 구원을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예언자는 말합니다.
>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다.”
희망이 끊어진 상황은 하나님을 부정할 이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예언자는 공동체의 죄의 본질을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힘을 확인하고 확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삶, 그것이 죄입니다.
이 폭력은 단지 물리적인 폭력만이 아닙니다. 정치, 경제, 사회 구조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오늘날 세계는 경쟁과 힘의 논리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경쟁하며 서로를 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이 오늘 우리의 현실처럼 들립니다.
>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함 가운데 행한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이사야는 놀라운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맺은 언약 때문에 구원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번개를 던지는 신처럼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폭력의 체제가 스스로 무너지는 역사 속에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국가 권력이나 종교 권력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과 말씀이 이어지는 공동체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그 드러남은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바로 빌라도 앞에 서 있는 예수의 모습입니다.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은 예수는 조롱 속에 서 있습니다.
그 모습은 폭력적인 정치와 종교 권력 앞에서 순교적 삶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종교가 인간의 경쟁과 자만을 해체하지 못하면 결국 폭력의 편에 서게 됩니다. 정치 권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은 결국 결탁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양심으로 사랑하며 사람을 살리는 삶은 제국의 권력에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삶은 늘 조롱과 공격을 받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속에서 부활의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세상에서는 실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몰락 속에서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오늘 우리가 사순절에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순교란 단지 죽음이 아닙니다.
순교란 폭력적인 현실 속에서도 자유로운 양심으로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 순교의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