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황은영 목사] 행복의 나라 – 2026년 07월 19일

이사야서 32장 1-8절, 요한계시록 11장 15-19절

어린 시절 흘려 들었던 노래 가운데 「행복의 나라」가 있습니다. 최근 같은 제목의 영화를 본 뒤, 오랜만에 이 노래를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밝고 낭만적인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들으니 이 노래가 말하는 행복은 생각보다 깊은 것이었습니다.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또 느껴보자.”

행복의 나라로 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새로운 눈입니다. 우리 앞을 가리고 있던 장막을 걷고, 세상을 바라보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다시 바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노래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봄과 새들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줘.”

여기서 행복은 거창한 성공이나 소유가 아닙니다. 풀밭을 걷고, 계절을 느끼고, 새들의 소리를 듣고,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풀과 바람과 계절과 새들, 곧 우리를 둘러싼 모든 존재를 향해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꿈으로 노래해야 할 만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신이 되고 싶었던 모습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현실의 나는 내가 생각했던 나와 너무 멀어져 있습니다. 꿈꾸었던 자리에서 밀려나고, 기대했던 모습과 달라지고, 더 이상 예전의 나를 유지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때 우리는 지금의 자신을 받아들이기보다 부정하기 쉽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귀를 닫습니다. 세상을 느끼지 않으려 하고, 사람들과 멀어지며, 자신을 좁은 틀 안에 가둡니다.

그러나 노래는 다시 말합니다.

“고개 숙인 그대여 눈을 떠보시게. 귀도 또 기울이세. 아침에 일어나면 자신 찾을 수 없이 밤과 낮 구별 없이, 고개 들고서 오세. 손에 손을 잡고서.”

행복의 나라를 꿈꾼다는 것은 과거의 나로 돌아가는 일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자신과 달라진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고,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새로운 귀로 이웃의 소리를 듣고, 닫혀 있던 감각을 열어 사람과 자연과 생명을 향해 다시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이사야와 요한계시록의 말씀도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행복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언젠가 도착할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삶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며,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말하고 일할 것인지를 전면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운 눈과 새로운 귀,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 시작됩니다.

이사야 32장은 행복의 나라를 꿈꾸는 일이 단순히 더 좋은 세상을 기다리는 데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 이웃의 아픔을 느끼는 방식, 현실을 말하는 방식,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당시 유다는 앗수르라는 거대한 제국의 위협 앞에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보다 애굽과의 군사동맹에 의지했습니다. 국제정세는 계산했지만, 자기 나라 안에서 가난한 사람의 말이 지워지고 정의가 무너지는 현실은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사야는 말합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고관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다.”

“보라”는 말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만을 세상의 전부로 여기지 말라는 요청입니다. 불의한 통치와 실패한 지도자들 너머에 있는 다른 나라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의”, 곧 *체데크*는 무너진 관계를 바로잡고 사람을 마땅한 자리에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정의”, 곧 *미슈파트*는 그 공의가 실제 재판과 행정, 사회제도 속에서 구현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나라는 좋은 왕 한 사람만 나타나는 나라가 아닙니다. 정의가 공동체의 관계와 제도 속으로 흘러가는 나라입니다.

2절은 그 통치를 네 가지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광풍을 피하는 곳 같고 폭우를 가리는 곳 같으며 마른 땅의 냇물 같고 곤비한 땅의 큰 바위 그늘 같을 것이다.”

좋은 통치는 지친 사람에게 또 하나의 폭풍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피난처가 되고, 메마른 곳에 물길을 내고, 지친 사람이 쉬어갈 그늘을 만듭니다. 성경이 묻는 것은 권력이 얼마나 강한가가 아닙니다. 그 힘이 누구를 살리고 있는가입니다.

3절은 말합니다.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며 듣는 자의 귀가 귀를 기울일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백성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공의로운 통치가 시작되면 그 상태가 역전됩니다. 눈이 다시 보고 귀가 다시 듣습니다.

불의한 사회는 제도만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각도 망가뜨립니다. 거짓이 반복되면 거짓이 진실처럼 보입니다. 혐오가 반복되면 누군가를 배제하는 일이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힘 있는 사람의 말은 사실처럼 들리고, 힘없는 사람의 말은 처음부터 믿을 수 없는 것처럼 취급됩니다.

그러나 행복의 나라를 꿈꾸는 사람은 다시 눈을 뜹니다. 그 사람이 어느 편인가를 묻기 전에 그 말이 참된가를 묻습니다. 나에게 유리한가를 묻기 전에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사람, 말할 힘을 잃은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4절은 눈과 귀의 변화가 마음과 혀의 변화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더듬는 자의 혀가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마음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단하는 중심입니다. 조급한 마음이 깨닫는다는 것은 선동과 단순한 구호에 끌려가지 않고 현실을 분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더듬던 혀가 분명하게 말한다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침묵했던 사람이 자기 삶을 자기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행복의 나라는 목소리가 큰 사람만 말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침묵당했던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 나라입니다.

5절에서는 사람에게 붙이는 이름도 바로잡힙니다.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하지 아니하겠고 악한 자를 고명한 자라 말하지 아니할 것이다.”

불의한 사회에서는 이름과 실체가 뒤바뀝니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을 전략가라고 부르고, 약한 사람에게 잔인한 사람을 결단력 있는 지도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면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하고, 존귀한 것을 존귀하다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6절과 7절은 어리석고 악한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보여줍니다. 그는 어리석은 말을 하고 마음으로 불의를 계획합니다. 하나님에 관해 잘못된 말을 하면서 굶주린 사람을 굶주리게 하고, 목마른 사람에게서 마실 것을 빼앗습니다.

이사야에게 종교적 거짓말과 사회적 착취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 약한 사람의 생명을 외면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관하여 잘못 말하는 것입니다.

7절은 악이 개인의 나쁜 감정에 머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악한 자는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한다.”

악은 도구를 만들고 제도를 이용하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가난한 사람의 말이 틀려서 무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옳은 말을 해도 힘이 없기 때문에 그 말이 지워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악한 계획에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8절은 말합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원문에는 분명한 대조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말한다.” 그러나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한다.”

악한 사람도 계획하고 존귀한 사람도 계획합니다. 차이는 그 계획이 무엇을 향하는가에 있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악한 계획에 대한 대답은 네거티브한 맞대응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더 크고 더 구체적인 선한 비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악한 자가 가난한 사람을 침묵시킬 방법을 계획한다면, 존귀한 자는 그 사람의 말이 들릴 자리를 계획합니다. 악한 자가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갈라놓는다면, 존귀한 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다시 만날 길을 계획합니다. 악한 자가 누구를 제거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존귀한 자는 어떻게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행복의 나라를 꿈꾼다는 것은 현실을 외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실의 악을 정확히 보면서도 그 악이 우리의 생각과 감각과 상상력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공포보다 오래 지속될 희망을 계획하고, 사람을 파괴하는 힘보다 더 끈질기게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행복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운 눈으로 보고, 새로운 귀로 듣고, 새로운 언어로 말하며,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 가운데 시작됩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의 장면은 이사야 32장과 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지만, 그 규모와 시야는 훨씬 더 큽니다. 이사야가 정의로운 왕과 고관들, 가난한 사람의 목소리, 선한 계획을 통해 새로워질 공동체를 보여준다면,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대한 우주적 투쟁 한가운데 서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자신이 세계에 평화와 질서를 가져왔다고 주장했습니다. 황제는 제국의 구원자와 주로 불렸고, 황제 숭배는 단순한 개인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충성과 사회적 소속의 표시였습니다. 황제와 제국의 질서에 순응하면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보호를 얻을 수 있었지만,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며 그 절대성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배제와 박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땅에서 바라본 현실은 소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악과 불의가 힘을 얻고, 제국은 영원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신실한 사람들은 고난을 받고, 거짓된 권력은 번영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보이지 않았고, 그리스도가 다스린다는 고백은 현실과 맞지 않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땅만 보지 말라고 합니다. 지상의 고난과 제국의 위세만을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 배후에 언제나 존재하는 하늘의 현실을 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보좌와 천상 예배의 장면이 반복됩니다. 땅에서는 황제가 보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늘에는 그보다 먼저, 그보다 높이 하나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지상에서는 제국의 군대와 경제와 정치가 역사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천상에서는 모든 권세와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주는 새로운 눈입니다. 보이는 현실을 부정하는 눈이 아니라,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눈입니다.

11장 15절에서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붑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큰 음성이 들립니다.

“세상의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직 땅의 현실이 완전히 바뀌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로마 제국은 여전히 존재하고, 악한 권력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음성은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선포합니다.

“세상의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

이것이 묵시적 신앙의 시각입니다. 현실이 이상을 증명하기를 기다린 뒤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미래가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은 로마의 황제가 다스린다고 말하지만, 하늘은 그리스도가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폭력과 권력이 영원하다고 말하지만, 하늘은 그리스도의 나라만이 세세토록 지속된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17절에서 스물네 장로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니 우리가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권능이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현실만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통치는 의심스럽게 보입니다. 악한 사람이 성공하고, 선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며, 거짓이 진실보다 더 큰 힘을 갖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현실을 하나님의 미래에서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현재를 기준으로 이상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완성될 나라를 기준으로 현재를 다시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18절은 “이방들이 분노하였다”고 말합니다.

왜 그들은 분노합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이 절대화한 현실을 흔들기 때문입니다. 제국은 자신이 만든 질서가 유일한 질서라고 주장합니다. 성공한 자가 옳고, 강한 자가 다스리며, 힘없는 자는 순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땅을 파괴하는 자들을 심판하고, 고난받은 종들과 성도들에게 상을 줍니다. 세상이 작다고 여긴 사람과 크다고 여긴 사람을 함께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자리로 부릅니다.

그러므로 이상은 언제나 현실에 적응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의 질서를 영원한 것으로 믿는 이들에게 거슬리는 소식입니다. 제국이 마지막 권력이 아니며, 성공과 힘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땅의 제국만 보지 않습니다. 19절에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그 안에서 언약궤가 보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함께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표지입니다.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였다는 것은 이 세계가 하나님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언약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고난받는 사람은 잊히지 않았고, 인간의 역사는 제국의 손에 맡겨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는 미래의 이상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 미래가 지금의 현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이 세계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나타난 뒤 번개와 음성과 천둥과 지진과 큰 우박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은 조용한 위로나 개인의 내면적 소망에 머물지 않습니다. 세상의 질서를 흔들고 전복하는 힘을 가집니다.

세상은 그 비전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열린 하늘을 봅니다. 땅의 보좌보다 높은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 제국의 권력보다 오래 지속되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봅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본 사람은 더 이상 현실에 단순히 적응하여 살 수 없습니다. 힘이 옳다고 말하는 세계 속에서 약한 자의 편에 서고, 성공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말하는 세계 속에서 모든 생명의 존엄을 고백하며, 절망이 마지막이라고 말하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미래를 현재처럼 살아갑니다.

행복의 나라를 꿈꾼다는 것은 세상의 고난을 모른 척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난의 한복판에서 보이는 현실보다 더 깊은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로마의 나라 너머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있고, 닫힌 땅의 질서 너머에 열린 하늘의 성전이 있으며, 인간의 배신과 폭력 너머에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 비전을 본 사람은 천둥과 번개처럼 세상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힘 안으로 들어가 살아갑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나라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백성으로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생명 사랑 교회 성도 여러분. 행복의 나라를 꿈꾼다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일이 아니라, 현실을 새롭게 보는 일입니다. 이사야는 눈과 귀와 마음이 열리고, 악한 계획에 맞서 사람을 살리는 존귀한 계획을 세우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지상의 제국과 고난 너머에 언제나 하나님의 보좌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있음을 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개를 들고, 닫힌 감각을 열고, 약한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미래를 지금의 삶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라는 고백은 결국 그 나라를 기다릴 뿐 아니라, 오늘 여기서 그 나라의 방식으로 살겠다는 결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