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3장 3-10절, 누가복음서 18장 9-14절, 로마서 3장 26-31절
[나는 의롭다.]
최근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으로 공교육 현장에서는 ‘교권침해’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교권침해의 원인을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해야한다는 것으로 말하는 정부가 이해가 되지 않고, 죽음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표적을 찾아 단죄하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소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지난 정권의 청소년 인권 조례를 탓하다가, 지금은 장애를 가진 자신의 아이를 학대한 혐의로 특수 교사를 고발한 한 웹툰 작가가 주요 표적이고, ‘갑질 학부모’가 문제라는 등, 한 교사의 안타까운 죽음은 뒤로한 채, 그래서 한국 교육의 원인이 ‘이거다.’라는 표적을 찾기에 급급합니다.
학생과 교사의 싸움이 되어 버린 듯한 언론과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이들에게 온갖 혐오의 언어들을 사용하며, 자신의 주장이 옳다며, 의로운 일을 행하고 있다며 본질은 잃어버린 채, 낙인찍기만 하고 있습니다.
정작 학생과 교사 모두가 정당한 대우를 받고 안전한 학교생활을 만드는 제도의 개선보다는 표적을 찾아 그들을 비난함으로, 자신 옳다고 생각한 의견에 힘을 실어줌으로 옳은 일을 행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고 피해자만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 주님의 긍휼은 겸손히 구하는 것]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들에게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지만, 당시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이 자신에게 심적으로 더 가깝고 세리는 꺼려하였을 것입니다. 14절에서 의로운 자가 누구인지 예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내용을 들은 사람들은 두 사람의 기도에 전혀 이상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자기 자신과 자신의 업적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듣기에 심지어 오늘 우리가 듣기에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았을 때, 그것에 반대하거나 그 바리새인을 헐뜯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바리새인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이 글을 본다면 이 기도에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그의 기도를 생각해 보면, 그의 기도는 겉으로는 올곧고 경건해 보이지만,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는 위대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긍휼에 자신이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그의 ‘업적’을 말하는 즉시 그의 말에서는 하나님의 경험을 찾아볼 수 없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강도, 사기꾼, 간음한 자로 여깁니다. 자신과 다른 이들을 모두 도덕적 실패자로 낙인 시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타인에 대한 모든 연결을 끊어냅니다.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이 바리새인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더 멀어지도록 내몹니다.
세리의 기도 역시 이것을 듣는 사람에게는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세리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부정적인 인물입니다. 세리의 이 고백은 좋지 않은 생활방식, 직업상 그가 저지르는 사기 행위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더 강화시킵니다. 그러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온 이 세리는 바리새인과 달리 스스로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성전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참회하는, 세리가 서 있는 위치, 그의 행동은 강력하게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임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 자비를 구하는 것뿐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두 사람의 기도를 비유로 드시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에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예수님의 말은 실로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세리는 유대인들의 세금을 거둬 로마에게 바치는 직업 특성 때문에, 그리고 외국인들과 자주 접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유대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회적 통념을 깨시고 죄인인 세리의 기도가 옳고, 그가 의롭다 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솔직하게 내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거나, 높이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기도를 드리지만, 실은 자신이 이야기만 늘어놓습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독백일 뿐입니다. 또한 이웃을 경멸합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다릅니다. 자신감을 차 있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낮춥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보이는 사람이 이웃을 업신여길 리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은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 신앙, 그리고 삶의 자세 가지고 있는지 분명이 보여줍니다.
[바리새인의 경건과 세리의 겸손]
그러나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들이 열심히 지켜온 신앙, 전통, 생활방식을 모두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리의 어떤 태도가 의롭다 인정을 받았는지, 이 바리새인의 어떤 모습이 의롭다 인정을 받지 못했는지 입니다. 우리는 종종 한 쪽으로 편향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리새인 아니면 세리, 이 비유를 통해서도 ‘바리새인처럼 살지 말고 세리처럼 살아야지.’라고 다짐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이 원하는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의 경건한 모습은 실로 우리가 본받을 만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한 바리새인은 의롭다 여김을 받지 못하였지만, 바리새인의 일상에서의 삶마저 부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이 금하는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정확하게 하나님께 드립니다. 반듯한 삶을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공부하고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노력만큼 경건한 유대인이 되었고, 그들의 행위에서는 흠 잡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바리새인들을 향한 부정적인 인식과 비난은 어쩌면 과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경건한 태도는 우리가 분명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건이 누군가를 평가하고 폄훼하며, 다른 사람의 신앙을 자신의 생각대로 평가하는 잣대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바리새인들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의 행동을 경건하게 하고, 세리처럼 겸손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일 뿐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역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경건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하지만, 매번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다 죄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누가 더 나으냐? 가 초점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이 ‘죄 아래 있다.’는 점에서 같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 자신들이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사람을 의인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할 때도 우리는 그 올바른 행동을 통해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선한 일을 통해 다른 사람과 구별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것이 낳는 결과는 결국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함부로 그 사람을 재단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선한 마음이 아니라, 나는 남과 다르다는 인정만이 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 준수를 통해 보여주는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 바울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행위인 율법 준수를 넘어서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고, 하나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 즉 복음을 전해줍니다.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는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를 통해 의롭다 여김을 받겠다는 태도, 유대인들이 보여주는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 즉 하나님의 구원이 ‘율법의 행위’와 상관이 없다는 바울의 말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든, 율법이 내가 의롭다 인정받는 실질적인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자부심과 실제 그들이 살아가는 행동 사이의 ‘차이’,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은 없는데, 언약 백성이라는 자부심만이 남은 그 행위를 문제 삼습니다. 율법이 가진 중요한 의미는 지킬 생각은 안하고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그저 자신의 의에 빠져 잘난 척만 하는 저들에게 “너네처럼 율법을 지키는 걸로 의롭다 인정 못 받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이 만들어진 의미보다 율법의 소유를 자랑했던 이들, 내면적 순종은 없으면서 외면의 신분만 내세웠던 이들, 마음의 할례는 받지 못했으면서 육신의 할례에 의존했던 이들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외면의 것에 집착합니다. 남과 나를 구별해 주고, 내 정체성을 분명히 해주고, 나를 남보다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라고 말하고 싶은 위선적 본성, 그것이 나를 의롭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죄만 낳을 뿐입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억눌림으로부터 건져 올릴 수 있는 진짜 해답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당사자의 행위와 자격과는 무관합니다.
[믿음은 행위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하는 것은 바울은 한 번도 올바른 행위를 나쁘게 말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 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그는 성도들의 삶을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라는 세 마디 말로 요약합니다(살전 1:3). 바울은 믿음과 행위를 하나로 엮습니다. 바울의 입장은 이 ‘믿음’과 ‘행위’가 뒤엉킴을 말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을 때, 의롭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 역시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분명 행위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남을 판단하지 않고,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지 않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는 믿음의 행위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실 수 있도록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계속 비워야합니다. 나의 생각과 판단과 의지를 모두 침묵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내 안에 하나님이 오시도록 그의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경험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를 믿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절기, 율법은 하나님을 더 신실하게 믿고, 하나님의 경험을 기억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구원(해방)을 경험한 히브리 민족]
오늘 출애굽기 본문에 나오는 ‘무교절’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하나님에서 기원합니다. 유월절부터 시작인 이 무교절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 하던 이집트 땅에서 구원(해방)해 낸 날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지키는 이 절기에는 유대인은 누룩을 넣은 빵을 먹지 말아야 하며, 집안의 모든 누룩(곰팡이)를 없애기 위해 대청소를 합니다. 이집트에서 급히 빠져나오느라 미처 빵을 발효시킬 여유가 없었던, 급히 나오느라 먹을 것을 장만할 수 없었던 그 날의 경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무교절을 지킨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무엇을 기억하게 하는 것일까요? 5절에 나오는 1)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 이르거든 다음과 같은 예식을 지키십시오.’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내다보게 하고, 2) 8절에 “당신들은 당신들 아들딸들에게, ‘이 예식은, 내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일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이다.’ 하고 설명하여 주십시오.” 라며 자신들의 해방의 경험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전할 것을 당부하고, 3)‘이 규례를 해마다 정해진 때에 지켜야 합니다.’라며 자신들을 해방시켜준, 하나님 경험을 늘 되새길 수 있게 합니다.
이 본문은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땅히 해야할 일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를 지키는 것 이전에 하나님의 구원활동,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신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에 있습니다. 또한 이 절기를 통해서 해방을 경험한 세대뿐만 아니라 그 후대의 자녀들,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있는 실재, 현존이 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 미래를 내다보게 하시고,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들의 조상들이 경험한 것과 동일하게 자신들의 하나님 경험을 통해서 그들만의 ‘출애굽 사건’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무교절을 지키는 모든 세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간을 기다리고, 빵의 맛을 보며, 여호와의 몫을 드리고, 이 역사를 기억해야하는 다음 세대에게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그 결과 그들의 유산이 된 이 하나의 절기, 하나의 예배 속에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해방의 경험을 잊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그 경험이 계속 지속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삶의 자리에서 한 절기로 이 날을 기억했습니다. 그 가르침은 후대에 계속 이어졌고, 행동하게 하였으며, 이 날의 의미도 함께 전달되었습니다.
[의롭다 인정받기 위하여]
우리의 믿음 역시 이처럼 하나님을 만난 경험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보다 앞선 신앙의 선배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나의 삶에서 만난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은 점점 자라납니다. 또한 매 주일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해마다 반복되는 절기를 통해서, 성찬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의로워지는 방법은 믿음의 행위,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성서에서 말하는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 역시 ‘그가 믿었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 역시, 그는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이며 하나님과 동행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창 6:9).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우리가 의롭다 인정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삶에서 예배로 드러내며, 앞으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드러내실 하나님을 기다리며, 결국 우리를 죄와 속박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경험하게 해주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를 믿는다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삶과 말씀대로 살아가야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며 남을 이웃을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신앙만이 옳다며 다른 이를 나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할 일은 이 세상의 온갖 장벽을 무너뜨리고, 차별을 없애며, 나의 행함을 자랑하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조건 없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겸손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 크신 하나님을 경험함을 믿습니다. 나의 행함을 자랑하지 않게 하시고, 내가 의롭다며 남을 판단하고, 업신여기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믿음’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을 뿐임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그럴 때 주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아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