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현 목사] 우아이(οὐαὶ), 우아이, 우아이 – 2025년 6월 1일
호세아서 4:1-3, 요한계시록 8:6-13
오늘은 부활절 일곱째주일이자, 한국교회에서 지키는 환경주일입니다. 1984년 한국교회와 기독교환경운동연대는 6월 첫째 주일을 환경주일로 지키며 창조세계의 회복과 보전을 위한 교회 차원의 다짐과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환경주일의 기원입니다. 이날의 의미를 생각하며 준비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창조된 것을 보시며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וַיַּ֥רְא אֱלֹהִ֖ים כִּי־טֽוֹב, εἶδεν ὁ θεὸς ὅτι καλόν)라고 반복적으로 찬양합니다. 우리말 성서에서는 ‘좋았다’고 번역된 부분은 히브리어 성서에서도 ‘좋다’라는 의미이지만 때론 ‘아름답다’라고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를 반영하여 초기 기독교인들의 구약성서인 헬라어로 번역된 칠십인역 성서에서는 이를 ‘아름답다(καλόν)’의 의미가 강한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해석을 선호합니다. 이처럼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또는 아름답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창조세계는 지금 어떤가요? 성도님들께서는 창조세계를 바라볼 때 아름답게 느끼시나요? 하나님께서는 아름답다고 느끼실까요? 우리가 이 질문을 평소에는 잊고 살았을지라도 환경주일을 맞아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우아이 우아이 우아이”입니다. 꽤 기이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아이(οὐαὶ)는 신약성서가 기록된 헬라어 표현으로 감탄사입니다. 이 표현은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8장 13절에 나타납니다. 이 말은 신약성서에서 주로 탄식이나 경고할 때 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화가 있다’로 번역된 부분이 바로 우아이에 해당합니다. 사실 ‘화가 있다’는 우아이를 너무 풀어서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말 표현으로는 ‘아아!’, ‘아이고!’ 정도가 어울리는 번역입니다. 하지만 우리말 성서에서 이를 ‘아아!’나 ‘아이고!’로 번역한다면 말의 느낌은 잘 살릴지 모르지만 말의 정확한 의미 전달이 어렵다고 판단한 탓에 ‘화가 있다’라고 번역합니다.
‘우아이’ 즉 비탄이나 경고를 나타내는 이 말은 과연 어떤 상황을 염두하고 쓰였던 것일까요? 오늘의 말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성도님들께서 요한계시록과 관련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요즘 교회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책입니다. 그러나 제가 어린 시절 우리나라에서 요한계시록은 참 많이 읽히고 설교에서도 많이 다뤄졌습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안타깝게도 그 당시 다뤄지던 요한계시록 본문들은 억지춘향식의 끼워 맞추기 해석으로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목회자의 신학적 성숙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들의 신학적 미성숙은 교회 성도들에게 잘못된 종말인식을 심어주었고, 또한 여러 기독교 계열 이단 종파들이 창궐하는데 크게 한 몫 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오히려 기존 교회들이 요한계시록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현상을 보면서 한국교회들이 요한계시록을 다루면 뭔가 이단스럽다는 느낌을 피하기 위해서 또는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다루기엔 너무나 어려운 책이라서 요한계시록을 잘 다루지 않는 것인가?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문제적인 책 오늘의 요한계시록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저는 일차적으로는 요한계시록의 역사적 배경에 기반해서 요한계시록을 읽고 나누려 합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오독을 방지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요한계시록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요한계시록은 철저하게 로마제국에 반기를 드는 문서입니다. 왜냐면 요한계시록의 주제가 하나님께서 로마제국에 의해 순교 당한 이들을 신원 하신다는 것과 로마제국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요한계시록은 많은 상징과 복잡한 수사법이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읽었던 초기 교회 사람들은 동시대의 문학과는 확연히 다른 화려한 문학적 풍경을 읽어내느라 놀랐을 것입니다. 세번째로 요한계시록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화와 유대 전통 문화가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녹아 있는 용광로 같은 문서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탄생시기는 도미티아누스(81-96)라는 로마 황제의 기독교 박해의 잔혹한 여파가 남아있던 시기입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기독교인들이 황제 숭배에 참여하지 않는 반국가 세력이라고 보았고 이에 그들을 박해했습니다. 고등학교 세계사 수업에서만 하더라도 로마는 정복한 국가의 신들을 인정하고 그들의 종교를 권장한다고 배웁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의 이런 종교관은 하나님만을 신으로 섬기는 기독교와 유대교랑 정면 충돌합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거부한 황제 숭배는 당시에 정치종교적으로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그들을 강력하게 처벌했습니다.
이런 맥락을 벗어나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게 된다면 요한계시록을 오독하게 됩니다. 이를 유념하며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7절에서 “우박과 불이 피에 섞여서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땅의 삼분의 일이 타버리고,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타버리고, 푸른 풀이 다 타버렸습니다.”라는 말씀은 출애굽기의 재앙들을 떠올리게 합니다(출 9:13-26; 시 78:48; 105:32).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박한 이집트를 향해 하나님께서 펼치신 재앙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여기서 땅의 삼분의 일이 타고, 나무의 삼분의 일과 푸른 풀이 타버렸다는 말씀은 로마 제국 핵심 자원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당시 나무는 로마의 전쟁 물자와 토목공사의 핵심 자원이었습니다.
로마는 나무를 기반으로 전쟁 장비를 만들었고, 정복지마다 신도시를 개척하여 지금도 남아 있는 화려한 로마의 건물을 짓는 무수히 많은 토목공사에 사용했습니다. 또한 당시 문화에서 푸른 풀은 가축에게 임하는 축복의 상징입니다(Cicero, Leg. Man. 6.14). 이에 대한 심판은 제국의 풍요를 자랑하는 농경지와 소수의 황족과 귀족 계층을 위한 고기를 생산하는 산업이 황폐해질 것을 의미합니다.
8절에서는 ‘불 붙는 큰 산’이 바다에 던져져서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됩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출애굽기에서 나일강의 일화가 연상됩니다. 출애굽기의 배경에서 이집트는 나일이라는 거대한 강을 나스리는 국가였습니다.
그리고 나일은 이집트에 주요 신인 태양신 라의 목욕장소라는 신화가 있으며, 당시에 나일은 이집트에 생명을 부여하는 고귀한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성서는 그런 나일을 하나님이 정복하시고 파괴하셨듯이 이번에는 로마가 지배하는 바다를 황폐하게 만드실 것을 이야기 합니다.
즉 이집트의 지배를 상징하는 것이 나일이었다면, 계시록 당시 로마의 지배를 상징하는 것은 바다 곧 지중해입니다. 당시 로마는 지중해의 지배자라는 호칭으로 자신들 규정했고 이를 통해 로마의 방식으로 평화와 안정의 시대를 열었다고 선전했습니다. 이처럼 로마와 지중해는 강력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나일에 이어서 지중해의 진정한 지배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 이야기는 9절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지중해의 피조물과 배들의 삼분의 일을 부수실 것입니다. 이는 지중해를 군사력으로 정복한 로마의 통치력을 무력화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이는 로마라는 제국의 수도가 제국의 모든 물자와 재원을 빨아들이는 행위 즉, 제국의 그늘인 식민지에서 고혈을 착취하는 행위가 제한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음으로 10절과 11절의 말씀은 로마의 상수도원을 파괴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로마는 모든 도시마다 안정적인 급수를 시행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도시의 먼 곳으로부터 깨끗한 물을 끌어들이는 ‘수도교’ 시설을 비롯해서 낙차를 활용한 분수대를 도시 곳곳에 만들어 둘 만큼 화려하게 발전했었습니다.
로마가 만든 도시에서는 깨끗한 물이 넘쳐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풍요와 생명의 상징인 식수를 파괴하실 것이라고 선언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역설적인 일화로 ‘히브리 백성들이 사흘 동안 물을 찾지 못하다가 마라에 이르렀지만, 그곳의 물이 너무 써서 먹을 수 없었을 때, 모세가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물을 달게 만드셨던’ 출애굽기 15장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이를 통해 성서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근원으로 대표되는 물의 주인이라는 선언이자, 로마의 기술과 노력의 성과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무력하다고 선언합니다.
이어지는 12절의 말씀은 해와 달과 별들이 타격을 입어서 어두워지고, 낮의 밝음도 빛을 잃고, 밤도 더 어두움에 놓일 것을 말합니다. 이는 대표적인 신의 진노의 표상으로 그리스-로마 문화권과 이스라엘 문화에서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징조입니다.
특히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태양과 달과 별들은 신과 영웅들을 뜻합니다. 태양신 아폴로는 당시 민간 신앙에서 제우스에 버금가는 강력한 신으로 모셔졌습니다. 달은 여신 디아나로 대표되고 있으며, 별들은 영웅들의 신화와 강력히 연결됨과 동시에 역사의 징조를 나타내는 고귀한 천상체들로 숭배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하나님께서 로마 곳곳에서 숭배되어지는 위대한 신과 영웅들의 힘을 강제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분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로마가 숭배하는 신들은 결코 막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선언과 징조가 선포되자 독수리 한 마리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외칩니다. “우아이, 우아이, 우아이” 곧, “화가 있다. 화가 있다. 화가 있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하고 외칩니다.
이 모습은 로마 제국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여 폭력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피를 흘리며 이 세상에 죄악을 범하고 있는 반면, 사람들이 미물이라 여기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물인 하늘의 새는 하나님의 탄식과 진노의 음성을 깨닫는 지혜로운 존재로 그려지는 장면입니다. 하늘의 새는 하나님의 음성을 대신 선포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계시록의 말씀은 자연스레 오늘 구약성서 본문인 호세아서의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이 아주 혼란스럽던 시절에 활동한 예언자 호세아는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규탄합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기는 북이스라엘이 강력했던 시기로 북이스라엘의 역사 중에서도 부유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았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여로보함 2세)은 강력한 힘과 부를 자랑하지만 그 이면에는 땅의 곳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폭력으로 다스리고, 세금이란 명목으로 수탈하고, 노예를 양산시켜 가정을 해체 시키고, 타인의 재산을 속여 뺐는 일이 빈번한 로마 제국의 절정기와도 닮아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에서 호세아는 말합니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저주와 사기와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다. 살육과 학살이 그칠 사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땅은 탄식하고, 주민은 쇠약해질 것이다. 들짐승과 하늘을 나는 새들도 다 야위고, 바다 속의 물고기들도 씨가 마를 것이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외면하며, 그 뜻에 반하는 방식으로 부를 쌓고, 향유하는 이들에게 “너희의 결과로 땅이 탄식할 것이고 창조세계가 파괴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를 선언했습니다.
이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말씀하신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돌보고 가꾸기 위한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선언하는 창세기의 말씀에 비춰보면,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들에게 주어진 창조세계 속에서 그 땅과 거기에 거하는 동족을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땅이 탄식하고 창조세계가 파괴되는 일이 발생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뜻이 담긴 호세아서의 말씀과 계시록의 말씀을 상호본문성에 차원에서 읽을 때, 창조세계 위에 펼쳐지는 로마의 폭력적인 지배가 하나님 뜻에 반하는 것이며, 이에 따른 결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순교와 더불어 창조세계 곳곳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부정하는 폭력에 희생된 애통의 역사들이 가득하고, 이는 종국적으로 창조세계의 황폐함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폭압적인 세력을 더이상 두고 보시지 않으실 것이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한다는 묵시의 선언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먼 옛날의 기록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함께 더듬어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에게 무엇이 남았을까요?
오래전의 이야기를 읽고 오래전의 일로 두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오래전에 기록된 계시록의 선언과 계시록이 펼친 하나님의 이상을 오늘 우리의 삶으로 끌어와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 따라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환경주일을 맞아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생각해봅니다. 크게는 우리 인류, 조금 작게는 우리 사회 그리고 더 작게는 우리 가정과 나는 각각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찬양한 창조세계를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돌보고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렇다고 고백하기 어려울 것 입니다.
계시록의 저자는 분명 오늘의 현실을 예언하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계시록을 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현실이 계시록의 파괴적인 상황과 흡사함을 인정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는 창조주의 아름다운 창조세계를 인류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드는 폭력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로마가 자신들의 압도적인 폭력적 힘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 질서에 반하는 피의 정복을 일삼았고, 호세아의 고발처럼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정의와 창조세계의 질서를 벗어나 동족을 수탈했듯이, 우리도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돌봄 명령을 따라 돌보지 않습니다. 인류는 창조세계에 가혹한 폭력을 가하여, 생명의 터전을 불사르고, 고갈시키고, 오염시키기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이 지구에서는 연일 대형 화재와 산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원시림이 타들어가고, 베어지고, 말라가며 황폐화 됩니다. 사막과 콘크리트는 영역을 확장합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비롯한 각종 발전소의 처리수가 곳곳에서 연일 쏟아져 나와 강과 바다로 들어갑니다. 원유 유출사고와 공장의 폐수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계 여러 곳의 지하에 위치한 탓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초대형 데이터 센터의 열기를 식히기 위한 냉각처리수도 강과 바다로 흘러갑니다. 지난 200년 전부터 바다의 온도를 올리고 산성화를 일으키는 인류의 행위는 급속도록 더 폭력적이 되고 있습니다. 제 개인의 삶을 돌아보아도 창조세계를 향한 저의 죄악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따뜻한 물을 사용하는 것, 시시때때로 샤워하는 일, 언제나 열심히 돌아가는 세탁기, 냉장고를 크게 바꾸고 바꿔도 꽉꽉 들어차는 소비 습관과 무신경한 전기의 남용들, 옷장에 쌓인 옷들, 수시로 전자기기를 최신형으로 바꾸고 싶은 충동, 전혀 죄의식 없이 사용하는 유튜브 시청을 포함한 인터넷 데이터 소비량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창조세계를 돌보는 행위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누리는 모든 편리함은 아름다웠던 창조세계에 폭력을 가해서 얻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는 이것을 발전과 진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누리는 편리함을 포기할 의사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 탓에 현재를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붕괴라 외치는 예언자적 생태주의자들은 각 사회마다 환영 받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생태주의자들을 너무 급진적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냐고 항변합니다. 너무 불편하다고 너나 그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국제적 경쟁이 치열한데 한가한 소리라고 그들을 쏘아 붙입니다. 또한 생태주의자들에게서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에서 부합하지 못한 행적을 발견하면 곧장 위선자라고 손가락질 합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 우리 인류는 아마 앞으로도 계속 노아의 때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각자가 하고 싶은 대로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노아처럼 언제 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때를 경고하고 준비하는 것과 같은 생태주의자들을 이죽거리며 대할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성서는 외칩니다. 우아이! 우아이! 우아이! 즉, 화! 화! 화! 땅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설교문을 써내려 가면서 매우 불편했습니다. 제가 본문에서 읽어낸 창조세계를 향한 성서의 뜻은 너무나 이상적이고 전적인 포기를 요구하는 급진적 결론이어서 그 뜻에 제가 오롯이 복종할 자신이 도무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 자체로 인정하면서 불편함 가득한 마음으로 성도님들과 나눕니다. 성도님들 각자 오늘의 말씀과 지금의 창조세계의 현실을 잇고자 한 저의 해석을 곱씹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뜻이 들리신다면 용기내어 그 뜻을 따르실 수 있길 기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창공을 가르며 하나님의 진노와 탄식을 전한 독수리의 외침을 우리의 현실에서 다시 곱씹으며 결단 해야 합니다. 창조세계의 회복과 보전을 위해서 한시라도 급하게 일상에서 작은 실천 하나씩이라도 쌓아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 소용없어 보이는 일이라도 비효율적이고, 불편하기 그지없어 보일지라도 우리는 노아를 생각하며 우리 귀에 들린 말씀을 쫓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저는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1]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고자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기도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를 용기와 믿음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를 믿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함께하시어 창조세계의 돌봄과 회복을 위한 주님의 길을 함께 걷게 하실 것입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 마태복음 13:9, 마가복음 4:9, 누가복음 8:8, 요한계시록 2:7, 2:11, 2:17, 2:29, 3:6, 3:13, 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