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 2025년 6월 8일
시편 104:24-33, 누가복음서 11:5-13, 사도행전 4:31-15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우리가 “네, 평안하게 보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좋은 일만 있어서, 불안하거나 두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평안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는 성령이 나와 함께 있음을 알고, 일어난 일을 혼자 경험하지 않기에 평안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믿음의 눈으로 일어난 일들을 해석하고 경험하기에 평안할 수 있습니다.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삶을 의탁하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교단에서 정한 선교주일입니다. 1953년 6월 10일 우리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새역사를 시작한 날을 기점으로, 신앙의 선배들이 이루어왔던 선교의 역사를 계승하고, 이 시대의 상황에 맞추어 교단, 교회, 성도가 선교적 사명을 ‘어떤 방식으로’ 감당해야 하는지를 함께 기도하고 다짐하는 뜻깊은 주일입니다.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 교단은 변화하는 시대의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새롭게 응답하며 신앙 문서를 내놓았습니다. 이 신앙 문서들은 복음의 진리와 신앙의 정수를 밝혔던 등대였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묻고 대답하는 교단의 기도와 고백이었습니다.
지난 교단의 제108회 총회 때는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이전보다 더 다양하게 드러난 시대의 문제점들, 선교적 사명에 대응하기 위해 보수화되는 교단의 문제가 있었음에도 ‘제7문서’를 제안하고 수정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채택된 ‘제7문서’에는 1)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 2) 교회의 위기와 기장성의 지속적 실천 3) 차별 없는 사랑의 교회공동체 4) 기후 위기와 생태적 전환 5) 과학기술의 발전과 디지털 혁명 6) 불평등의 극복과 경제정의 실현 7) 한반도 평화를 일구어 나가는 교회, 여기에 제언으로 ‘펜데믹 이후 미래세대를 위한 선교의 새 이름, 마음의 에큐메니즘’을 더하여, 총 여덟 개의 주제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변화하는 이 시대의 문제들을 끌어안고 씨름하면서 교단과 교회가 어떤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지가 문서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교회공동체의 신뢰가 떨어지고, 내부적으로도 위기인 시대에 오히려 선교의 과제는 더 폭넓게 주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교단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로 기대하고 있고, 지금 영국에서 박사 학위 과정 중에 있는 박선교 목사는 얼마 전 2025년 가톨릭 평론지에 실린 <극우주의에 대한 본회퍼 신학의 응답>에서 본회퍼 목사의 삶과 글을 빌어 교회의 역할에 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핍박받는 유대인을 구원하는 것이 곧 교회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토대로 하며,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하느님의 뜻을 대리한 것처럼, 교회도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을 대리하며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회퍼 목사 담론의 진정한 의미는 반정부 투쟁을 위한 구호가 아니라, 혐오와 배제의 문화와 구조를 극복해 나가기 위한 저항의 구호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혐오와 차별에 직면해 있는 우리 주변의 이웃을 보듬어야 한다. 그리고 한반도 분단 구조에 맞서 저항하며, 한반도 평화와 환대의 공동체를 일구어 가야 한다. 교회의 진정한 본질과 목적은 타인을 섬기는 헌신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는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만 진정한 교회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우리가 ‘여전히 그리고 온전히’ 본회퍼 목사의 삶과 신학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교회의 진정한 본질과 목적은 타인을 섬기는 헌신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는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만 진정한 교회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장입니다.
교단과 교회들에 그리고 우리 교회공동체에 요구되는 목적입니다. 교회가 타자를 위해 존재하기 위한 모든 실천적인 방식이 바로 ‘선교’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교회가 ‘선교 사명에 충실한 교회’가 되기 위해 한 고백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첫 문장부터가 인상적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세상에 선포되고 실현될 때에 이 사회의 모든 아픔과 고통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단순히 교인의 수를 늘리고자 하는 전도는 지양하고, 세상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교회의 본질,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위해 교회가 세워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교회는 타자를 위해 살지 않을 수 없고, 타자를 위해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우리의 고백이 잘 실현된 공동체를 사도행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령강림 직후에 세워진 초대 교회공동체에서 우리가 고백한 선교적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31-35 “31 그들이 기도를 마치니,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32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34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는 공동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는 공동체, 가난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공동체,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어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는 공동체.
이런 공동체를 어떻게 이룰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성령 충만함을 통해 이룰 수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들만의 힘과 능력, 지식과 경험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아닙니다. 순전히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공동체입니다. 성령이 제자 공동체에 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순종을 통해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성령의 임재와 역사 그리고 성도의 순종이 어우러지면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고 놀랄만한 새롭고 창조적인 공동체, 사랑과 환대의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이런 공동체를 통해 세상의 상처들은 치유되고, 생명은 다시 살아납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자신이 사라진 이후의 제자 공동체를 위해,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성령을 받기 위해 하나님에게 간구하라고 요청했습니다.
누가복음 11:5-13 “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6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7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0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된 사람으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12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씀처럼 구하고, 두드리고, 찾아서 성령을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구하고, 두드리고, 찾아야 할 것은 성령이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 외에 제자 공동체가 간절히 구하고 두드리고 찾아서 얻어야 할 것은 없었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 제자 공동체는 그야말로 형편없기 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령강림 후 제자 공동체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본문의 모습처럼,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헌신하여 타인과 연합하며 평등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선교는 성령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성령이 어떤 역할을 하시기에, 성령이 임하자, 제자 공동체가 변할 수 있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영, 성령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04:24-33 “24 주님,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 25 저 크고 넓은 바다에는, 크고 작은 고기들이 헤아릴 수 없이 우글거립니다.”
먼저 시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이 창조물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고백합니다. “26 물 위로는 배들도 오가며, 주님이 지으신 리워야단도 그 속에서 놉니다. 27 이 모든 피조물이 주님만 바라보며, 때를 따라서 먹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28 주님께서 그들에게 먹이를 주시면, 그들은 받아 먹고, 주님께서 손을 펴 먹을 것을 주시면 그들은 만족해 합니다. 29 그러나 주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은 떨면서 두려워하고, 주님께서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모든 생명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자크 엘룰은 시편에도 나오는 리워야단의 존재를 <자유, 사랑, 능력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악어라고도 번역되는 리워야단은 깨어나면 무서운 해를 끼칠 것이 분명한 “심연의 야수”, “혼돈의 괴물”, “악의 파괴력”, “하나님의 원수”이다. 리워야단은 물질적 힘이면서 영적 권세다(130쪽). 이것들은 세계와 인간이 순전히 물질로 축소될 때, 그리하여 물질이 지배할 때 드러나는 악의 모습이다(132쪽). 이런 리워야단과 같은 악의 상징은 인간의 삶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사탄적 원리들이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처형으로 몰아간 그 힘들이다(132쪽).
하지만 시인은 시편의 고백에서 이런 상징의 리워야단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리워야단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창조주시라고 고백합니다. 리워야단 역시도 하나님의 영, 주님의 영을 통해 다시 창조되어야 하고, 다시 새롭게 되어야 할 다른 창조물들과 동일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30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이런 창조주 하나님을 시인은 찬양합니다. “31 주님의 영광은 영원하여라. 주님은 친히 행하신 일로 기뻐하신다. 32 주님이 굽어보기만 하셔도 땅은 떨고, 주님이 산에 닿기만 하셔도 산이 연기를 뿜는다. 33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주님을 노래할 것이다. 숨을 거두는 그 때까지 나의 하나님께 노래할 것이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주님의 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원하시는 뜻대로 ‘다시 창조하는 영’, ‘다시 새롭게 하는 영’입니다. 주님의 영이 주입될 때, 악의 상징인 리워야단을 포함한 창조물들은 생명을 다시 얻고, 더 온전한 모습으로 지어지게 됩니다.
오늘 교회의 역할, 성도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주님의 영을 받은 자들로서 죽어 가는 자들에게 다시 생명을 얻게 하는 역할, 쓰러져 가는 이들의 삶을 다시 온전하게 만드는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에 주어졌습니다.
초기 교회공동체에는 가난한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분명 죽음을 무릅쓰고 담대하게 전파한 복음이 더 많은 이들에게 들어갔다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지배적이었던 돈과 재물의 우상에서 벗어나, 제국주의를 뒤집거나 혹은 그 안에서 더 평등하고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으리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평등한 공동체는 당시 로마 제국주의의 대항 공동체임이 분명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로마 제국과 다르지 않은 돈과 재물을 우상 숭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무엇이겠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 순응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항할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는 교회공동체가 이룰 수 있습니다.
‘선교 사명에 충실한 교회’가 되기 위해,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위해 지어진 것이라고 우리 스스로가 직접 고백하고 입술로 시인했다면, 이제 우리는 시도해야 하고, 달라져야 합니다.
초대 교회공동체가 이루었던 가난한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던 모습에서 이상중 목사는 우리 교회의 선교적 방향성을 살핍니다.
가난한 자가 단 한 명도 없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해야 하는 선교의 현장은, ‘제대로 된 대우와 존중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 해고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는 현장입니다.
노동자의 삶은 시간이 흐를수록 어떻게 된 것이 상황이 좋아지지 않고 더 후퇴하고 있기만 합니다. 이익을 위해 사람을 도구화고, 이익을 위해 각종 규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SPC의 노동자가 반복해서 사망하고, 태안화력발전소의 하청노동자가 사망합니다.
이번 태안화력발전소의 살해 사건은 6년 전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김용균씨가 사망한 바로 그 발전소입니다. 이런 이익만을 좇는 거대 자본이 바로 오늘날의 리워야단입니다.
교단의 ‘제7문서’에도 나오듯 불평등의 극복과 경제정의 실현은 당면한 선교적 과제입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은 이런 리워야단을 통제하고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교회공동체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을 대리하며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주님의 영, 생명의 영, 다시 창조하고 새롭게 하는 영을 받은 우리가 이 땅을 바꾸어나가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도록 하는 영이며, 성령은 우리가 인간답게 될 수 있도록 돕는 영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믿습니다. 우리에게 불어 넣으신 성령으로 인해 우리 교회공동체가 이 땅에 생명을 창조하고, 새롭게 할 것을 말입니다. 이 땅에 생명을 살리고 회복하려 할 때, 악의 세력들을 통솔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