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 2025년 7월 13일
스가랴서 4장 6-10절, 고린도전서 12장 7-11절, 누가복음서 17장 7-10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한낮의 온도가 37도까지 오르는 폭염과 밤에 잠을 이룰 수 없는 열대야가 며칠간 지속되었습니다. 이렇게 육신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평안의 삶과 멀어지게 하는 큰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하나님이 주신 평안에서 끊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평안이 이미 우리 안에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불평과 불만, 걱정과 두려움이 고개를 들 때마다, 시선을 외부가 아닌 내면으로 돌려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멈추고, ‘나에게 주어진 평안을 누리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다시 평안을 선택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성도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는 위기이고, 이 위기는 세상과 전혀 다를 바 없거나 더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교회의 모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결국 성도가 성도답게 살 때, 교회가 교회다울 때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것처럼,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 본’이 되어야 하고 일상의 삶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이겨내야 합니다.
성도님들은 한 주간 무엇과 싸우다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바울이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단언했듯, 예수님이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라고 하셨듯 ‘더 많이 누리고 소유하려는 끝없는 욕망’과 싸워야 합니다.
한 주간 이 싸움에서 승리한 성도로 사셨기를 또한 소망합니다.
지난주 폭염으로 인해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경북 구미에 있는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베트남 국적의 일용직 20대 노동자였습니다. 첫 출근 근무 중 화장실 다녀온다고 한 뒤 쓰러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발견 당시 체온은 40.2도였으며 해당일의 최고 기온은 38.3도였습니다.
7월 9일 전국 건설노조 대구 경북 건설지부는 대구시 수성구 대구고용노동청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N씨가 숨진 사업장에선 내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혹서기 단축근무(오전6시부터 오후1시까지 일하는 단축근무)가 시행되고 있었지만, 이주노동자들은 정상 근무를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라고 했습니다. 이 사업장은 안전조치도 다수 위반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결국 돈과 이익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가 사망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살인입니다. 성도가 무엇과 싸워야 할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이런 불의한 현실 앞에 눈감지 않고,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적어도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모인 공동체라면 반드시 이 불의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나누며, 이런 불의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가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도’에 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짧은 네 구절이지만, 이 네 구절에 ‘제자도’에 관한 예수님의 단호함과 강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7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올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고 그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8 오히려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너는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야,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이 비유는 예수님 당시의 상황에서 종, 노예 제도에 관한 보편적인 관습에 호소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종이 밭을 갈고, 양을 치고 들에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지쳐 집으로 돌아왔지만, 종을 기다리는 건 휴식과 식사가 아니라 또다른 노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친 종일지라도, 밥상을 차려놓고 종을 기다렸다가 ‘수고 많았다. 이제 같이 상에 앉아서 밥 먹자.’라고 친절하게 말하는 주인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힘겹게 노동하고 돌아온 종에게 어떻게 대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이제 먹을 것을 준비하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시중을 들어라.’라고 명령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한 마디를 더 얹어 말씀하십니다.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종은 주인을 위해 낮에는 들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돌아와 식사를 준비하고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야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부당하지만, 종은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을 한 이후에 어떻게 대답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제자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위해서 이 비유에 나오는 종과 같이 일함이 마땅하다고 하십니다. 너무나 단호해서 어떤 타협의 여지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요구를 이행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특별한 대우를 받는 권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처지에서 나온 의무’일 뿐임을 확실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종은 단지 자기에게 맡겨진 분명한 책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여러 일 가운데 종의 위치는 주인의 명령, 지시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노예를 예로 들어 하신 이 설명은 오늘 우리에게 불편할 수도 있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렸듯 ‘당시의 보편적인 관습’이었기에 당시 제자들에게 노예 제도는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충성, 헌신, 순종의 좋은 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자도’는 이런 종의 삶과 같다고 하시며, 충성되게 맡겨진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충성되게 ‘맡겨진 일’을 하고, 그 ‘맡겨진 일’을 했다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바라지 말라고 말입니다.
성도는 “이제 할 만큼 했으니 쉬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만 하소서.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기다리고, 준비하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누리는 자가 아니라 일하는 자이고, 쉬는 자가 아니라 헌신하는 자이고, 섬김을 받으려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종의 형편이 좋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 제자의 삶보다는 더 5나은 형편입니다. 왜냐하면 종은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명령받고 이행하지만, 제자는 성도는 이런 종과 같은 순종의 태도로 무모해 보이는 명령을 따르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처음부터 무리였습니다. 가진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뿐입니까? 누가복음 9:2-5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게 하시려고 그들을 내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길을 떠나는 데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아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은화도 가지고 가지 말고, 속옷도 두 벌씩은 가지고 가지 말아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에 머물다가, 거기에서 떠나거라.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려서, 그들을 거스르는 증거물로 삼아라.””
길을 떠나는 데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생전 본적도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과 머물고 잘 곳을 청해야 합니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말은 쉽지, 가능한 일입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은 ‘언제나’ 이렇게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늘날의 성도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명령하십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성도에게 맡기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스가랴의 본문을 보겠습니다. 스가랴는 포로 귀환 공동체를 위한 7개의 이상을 봅니다. 오늘 말씀은 그 가운데 4번째 이상의 내용입니다. “6 그가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스룹바벨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보십시오. 포로 귀환 공동체의 지도자 스룹바벨을 하나님이 택하십니다. 택한 스룹바벨에게 성전 건축을 맡기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그 일은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입니다.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지만, 이루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이 일이 간단하지 않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뒤의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는 평지일 뿐이다. 그가 머릿돌을 떠서 내올 때에, 사람들은 그 돌을 보고서 ‘아름답다, 아름답다!’ 하고 외칠 것이다.” 8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9 “스룹바벨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으니, 그가 이 일을 마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0 “시작이 미약하다고 비웃는 자가 누구냐? 스룹바벨이 돌로 된 측량추를 손에 잡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 이 일곱 눈은 온 세상을 살피는 나 주의 눈이다.””
큰 산이라는 적대자가 등장하고, ‘시작이 미약하다!’하고 비웃는 자도 나타납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된 것도 없는 폐허더미 위에서, 반대하는 자들의 조롱과 훼방까지 막으며 성전을 건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큰 산을 평지로 만드시며, 비웃음이 기쁨으로 변화 되게 하십니다.
앞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제가 읽어드리지 않은 구절이 있습니다. “1 예수께서 그 열둘을 한 자리에 불러놓으시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능을 주시고,”(누가복음 9:1)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신 이 능력과 권능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까? 몸에 장착이 되어서 나에게 이런 능력과 권능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합니까? 아닙니다. 오로지 ‘내가 주었다.’라는 예수님의 말을 믿고 떠나는 것입니다.
스룹바벨도 폐허더미 위에, 방해자들의 훼방을 견디며 성전을 건축할 때, “9a 스룹바벨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으니, 그가 이 일을 마칠 것이다.”라고 하나님이 스가랴를 통해서 하신 이 말씀을 믿고 이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의 눈에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라고 보여질 행동들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맡기시는 일들은 누구나 실현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 일들은 모험이 필요하고, 삶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비웃는 이들이 있고, 대적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맡겨진 그 일’이 옳은 일, 정의로운 일이라면 성도는 해나가야 합니다. 거두는 이가 따로 있고, 먼 미래에 노력의 결실이 맺힐지라도 해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스룹바벨을 돕는 하나님의 영, 제자들에게 주셨던 능력의 영을 디모데전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9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10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11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
성도가 원하는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는 성령이 아닙니다. 성령이 원하는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십니다. 은사를 받은 자는 그 은사를 공동 이익을 위해 섬겨야 합니다.
이 영은 공동 이익을 위해 오늘 우리에게도 은사를 주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은사는 내가 원하는 바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왜인가요?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백성들과 선지자들과 제자들에게 불가능한 일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성도의 삶 역시도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앞이 안 보이는 짙은 안개 속을 지나가는 일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짙은 안개 속을 성도는 ‘하나님께서 이루신다.’하신 약속을 믿으며 걷습니다. 그 걸음에 성도가 명령에 따라 이행할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해 반드시 도우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맡겨진 것 같은 일을 보며, ‘이건 쉬운데, 이건 얼마든지 할 수 있겠는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괴롭고, 저항하게 되는 일. 결국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만 할 수 있는 일, 불가능해 보이는 그 일이 보인다면 그 일이야말로 나에게 성도에게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에 맡겨진 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 중 하나가 바로 ‘바위에 달걀 치기’처럼 보이는 이 땅의 불의하고 불평등한 노동 현실을 바꾸어 나가는 정의, 평화, 평등의 하나님 나라로 향해 가는 일입니다.
폭염 속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익을 위해 안전 규칙을 무시하여 허다한 생명을 살인했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 보호받아 마땅한 이들이 오히려 가장 먼저 배제되고, 차별받고, 희생당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불의한 세상에서 발 뻗고 잠이 옵니까? 정의 평화 생명의 기치를 걸고 공동체를 이룬 우리라면 더욱 잠이 오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쉬운 일이 아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맡기십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이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