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안식일은 거룩한 날 – 2025년 8월 17일
출애굽기 31장 12-17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두 주간 평안하셨나요?
성도는 평안해야 합니다.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평안할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는 첫걸음이 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어진 평안을 선택하고 누리는 성도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금요일 청소년부 수련회 관계로 파주에 있는 숙소로 선생님들을 모셔다드리고, 다음날 다시 교회로 모시고 와야 하는 일정이 있어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다음날 편의를 위해 금요일 하루를 수련회 장소 가까이에 있는 아버지 댁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댁에는 TV가 켜있었는데, 평상시에 전혀 보지 않는 기독교 관련 방송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방송을 보고 계셔서 TV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TV 화면에는 ‘히즈빈스’라는 상호를 가진 장애인 바리스타를 양성하고 또 고용해서 모범이 되는 기업의 대표가 나와서 간증을 하고 있었습니다. 간증을 듣다 보니 참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듣다가 고개를 TV로 돌렸더니, 공교롭게도 ‘2024 다니엘 기도회’라는 타이틀이 적혀 있었습니다. 방송팀장으로 부당한 대우와 환경에서 일하시다 과로사로 돌아가신 분이 만든, 성도님들에게 2주 전에 설교로 말씀드렸던 바로 그 방송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보며 ‘아멘, 아멘’을 외치고 감동과 은혜를 경험했을 이 영상을 방송하고, 만들어내기 위해 교회 노동자가 돌아가셨구나. 어쩌면, ‘그래도 그렇게 해서 결과가 좋았잖아!, 효과가 있었잖아!’라며 이런 간증과 찬양을 들으며 수많은 사람이 ‘순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다시 참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논리를 좇아가고 있고, 이익을 위해 노동자를 죽이고 또 죽음으로 몰아넣는 SPC나 쿠팡, 세종호텔 등과 다르지 않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면 저는 결국에는 믿음 생활에 사용되어야 할 시간,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시간, 말씀이 체화되어야 할 시간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또,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을 위해서인지조차 모른 채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문제입니다.
‘깨어 있는 삶’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내가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의 일이고 말인지 그리고 이 일과 말이 신앙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습관적으로 빠르게 일 처리를 하거나 말하지 않고, 그 순간순간에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일의 방식이 불의한 방식은 아닐까?’, ‘내가 늘 하던 말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모습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부족한 우리는 어느새 성경이 말하는 ‘안식일’ 오늘날의 주일조차도 빠르게 소비하며 살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지켜야 할 주일이 ‘온전한 하루’가 아니라 1-2시간 정도만이 ‘주일’이 되어버린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으로는 ‘깨어 있는 삶’이란 불가능합니다.
안식일에 관해 말씀하는 오늘 출애굽기 본문을 나누며 저와 성도님들이 거룩한 안식일인 주일로부터 다시 삶을 바로 잡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2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라. 이것이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세워진 표징이 되어, 너희를 거룩하게 구별한 이가 나 주임을 알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하게 구별된 존재’들이며 이렇게 ‘구별하신 분이 하나님’ 이심을 알게 하겠다는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합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다.’ 무엇으로부터 구별된 사람들입니까? 이 구별에는 명확한 비교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당시의 애굽, 이집트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막 노예 신분으로 살아가던 이집트에서 탈출한 상태입니다. 안식일은 몸, 육신의 탈출은 했지만, 아직 마음과 영혼은 탈출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주어진 시간입니다.
성도님들에게 예화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왕국에 어린 왕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왕자는 적국의 침략으로 인해 어릴 적에 포로로 잡혀 노예로 살게 되었습니다. 왕자는 자신의 본래 신분을 모두 잊고, 척박한 땅에서 고된 노동과 멸시를 견디며 노예의 삶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는 주인이 주는 최소한의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항상 눈치를 살피며, 다른 노예들과 다투는 것이 생존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왕국은 왕자를 되찾았고 그를 궁궐로 데려왔습니다. 왕은 잃어버렸던 아들을 환영하며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진수성찬을 차려주고, 왕자로서의 모든 권위와 특권을 되찾아주었습니다.
하지만 왕자는 여전히 노예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는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옷이 더러워질까 노심초사하며 몸을 웅크렸고, 다른 사람들이 먹고 남긴 음식 부스러기를 몰래 주워 먹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호화로운 침대 대신 차가운 바닥에서 잠을 청했고, 자신에게 명령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끊임없이 주변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신하들은 그에게 “왕자님, 이제 당신은 왕의 자녀입니다. 더 이상 노예가 아닙니다. 마음껏 누리십시오”라고 말했지만, 왕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진 노예의 습관은 하루아침에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왕의 자녀라는 신분을 회복했지만, 오랜 세월 노예로 살아온 그의 ‘노예 근성’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기보다는 숨고 피하기 급급했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기보다는 익숙한 틀 안에서 안정을 찾으려 했습니다.
결국 왕자는 자신의 신분을 진정으로 깨닫고, 그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 매일매일 노력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왕의 자녀임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과거의 습관과 생각들을 의식적으로 버려야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이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고,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과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습니다. 노예의 신분은 벗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삶의 습관과 마음은 노예 상태였습니다.
이들이 출애굽을 하고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이렇게 외쳤습니다. “온 회중이 소리 높여 아우성쳤다.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다.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온 회중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우리가 이 광야에서라도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왜 우리를 이 땅으로 끌고 와서, 칼에 맞아 죽게 하는가? 왜 우리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사로잡히게 하는가?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그들은 또 서로 말하였다. “우두머리를 세우자. 그리고 이집트로 돌아가자.””(민수기 14:1-4)
예화의 왕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매일 노력했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이라는 시간을 주셔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고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 오늘 우리의 주일은 그렇기에 너무나 중요한 시간입니다. 아브라함 헤셀의 <안식>이라는 책에는 안식일을 온전히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물질세계에 예속되지 않고 살려면, ‘내적인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씩씩하게, 끊임없이, 은밀히 싸워야 한다. 사람의 지배와 사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내적인 해방을 쟁취할 수 없다. 고도의 정치적 해방과 사회적 해방을 쟁취한 사람은 많지만, 사물의 노예가 되지 않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가 항구적으로 씨름해야 할 문제는 이것이다.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면서 자유를 누리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사물과 더불어 살면서 사물에 예속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자유를 위해 떼어 놓은 한 주의 한 날, 곧잘 파괴의 무기로 둔갑하는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는 날, 자신을 돌아보는 날, 속된 것을 멀리하는 날, 형식적인 의무에서 벗어나는 날, 기술 문명의 우상들을 숭배하지 않는 날, 돈을 쓰지 않는 날, 이익을 얻고자 동료 인간 및 자연 세력과 싸우다가 휴전하는 날,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다.”
아브라함 헤셀의 안식일에 관한 글처럼 오늘 우리는 주일에 삶을 멈추고, 온전히 하나님께 조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일예배 1-2시간 드리고 ‘거룩한 주일’의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주일의 하루를 온전히 거룩하게 지내는 삶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은 평일에 하지 못한 나머지의 것을 채우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14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 날을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 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겨레로부터 제거될 것이다. 15 엿새 동안은 일을 하고, 이렛날은 나 주에게 바친 거룩한 날이므로, 완전히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오늘 이 말씀을 율법적으로 지키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안식일이 몸과 마음 모두를 하나님께로 돌리는 시간임을 잊지 말자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한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거룩’이라는 히브리어 ‘카도쉬’는 창세기에서 단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 창조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건 지키지 않건 이미 거룩한 날입니다. 이미 복된 날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성도에게는 거룩함의 수혜를 입는 날입니다. 주렁주렁 열린 풍성한 과일을 따 먹는 날이고, 이미 차려진 진수성찬을 먹는 날입니다.
모든 노동 또는 인간적인 노력 등을 멈추고 온전히 주어진 주일에 존재함으로 삶을 다시 하나님께로 조율하여 삶을 회복하는 신앙생활은 매우 중요한 신앙의 실천입니다. 안식일은 이런 존재론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의 성소가 아니라 시간의 성소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헤셀은 이렇게도 표현했습니다. “안식일은 온통 거룩하다. 일곱째 날이 될 때마다 기적이 일어난다. 사람의 영혼과 만물의 영혼이 깨어난다.”
“16 이스라엘 자손은 이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아, 그들 대대로 지켜야 한다. 17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니, 이는, 나 주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면서 숨을 돌렸기 때문이다.”
영원한 표징이기에 오늘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하지만 거룩한 주일은 ‘공간의 성소’가 아니라 ‘시간의 성소’로서 지켜져야 합니다. 하나님도 상징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엿새 동안은 일하시고 이렛날에는 쉬면서 창조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창조된 모든 것들에 생명과 영을 주셔서 창조와 삶을 완성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성도의 삶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면, 그들은 영원히 노예로 살 수밖에 없듯이 성도가 주일마저 패스트푸드를 소비하듯이 소비하게 되면, 성도는 성도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헤셀은 <안식>이라는 책에서 “기적은 안식일과 함께 온다. 영혼이 되살아나고, 여분의 영혼이 태어나며, 안식일의 성스러운 광채가 집안 구석구석을 가득 채운다. 노여움이 걷히고, 긴장이 사라지며, 얼굴에는 환한 빛이 자리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은혜는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온전히 또 거룩하게 주일 하루를 내어 드릴 때 경험할 수 있는 축복입니다. 온전히 거룩한 하루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가운데 바로 세워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