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이상중 목사] 내가 너를 고쳐 주마 – 2025년 8월 24일

이사야서 57장 14-19절, 누가복음서 14장 7-14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원하건 원치 않건 끊임없이 어떤 일들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떻게 경험할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경험하지 않고, 평안의 마음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믿음 성숙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주일은 거룩한 날이며, 물질의 노예, 다른 우상의 노예로 살았던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자녀,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고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배 중 찬송가 한 절, 신앙고백의 한 문장을 깨어 의식하면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거룩한 안식일, 주일을 그저 습관처럼 빠르게 소비하고 끝내는 태도로서가 아니라 세상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자유로운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특별히 창립 13주년 기념 감사주일로 ‘건강한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날로 온 주일 하루를 깨어 있는 ‘시간의 성소’로 지킬 수 있기를 또한 소망합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특별히 경계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에서 나누었던 ‘바쁜 삶’과 오늘 본문을 통해 묵상하게 될 ‘탐욕스러운 죄’인 ‘영향력’입니다.

오늘 주어진 말씀을 나누며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건강한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57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직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귀환공동체는 바빌론 제국의 포로로 긴 고난의 시간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들이 맞이한 현실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도덕적으로 타락한 공동체였습니다.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졌고, 사회적 불의가 가득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지도자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사야 56장 10절은 지도자들에 대해 이렇게 고발합니다. “백성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것들은 눈이 멀어서 살피지도 못한다. 지도자가 되어 망을 보라고 하였더니, 벙어리 개가 되어서 야수가 와도 짖지도 못한다. 기껏 한다는 것이 꿈이나 꾸고, 늘어지게 누워서 잠자기나 좋아한다.”

백성을 지켜야 할 지도자들의 눈이 멀고 귀가 닫혀 버렸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대신, 그저 편안하게 늘어져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57장 1절은 더 참담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의인이 망해도 그것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경건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도 그 뜻을 깨닫는 자가 없다. 의인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실상은 재앙을 피하여 가는 것이다.” 의로운 사람들이 세상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살다가 멸망하거나 세상을 떠나도, 아무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상숭배라는 심각한 죄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57장 5-6절입니다. “너희는 상수리나무 사이에서,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정욕에 불타 바람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서, 갈라진 바위 밑에서, 자식들을 죽여 제물로 바쳤다. 너는 골짜기의 매끈한 돌들을 가져다가, 그것들을 신으로 떠받들었다. 네가 그것들에게 술을 부어 바치고, 또 곡식제물을 바쳤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며 심지어 자식까지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죄를 저지르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 채 살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죄는 하나님의 얼굴을 등지게 하는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암울한 배경 속에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 14절을 통해 강력한 희망의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말한다. 땅을 돋우고 돋우어서 길을 내어라. 나의 백성이 걷는 길에 거치는 것이 없게 하여라.”

이 구절은 이사야 40:3-4과도 매우 비슷한 말씀입니다.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세례 요한이 이 이사야의 본문을 인용해 예수님이 오실 길을 닦으라는 선포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사야 57:14과 40:3-4 두 본문 모두 공통 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회복, 구원을 앞두고 백성들이 먼저 준비해야 할 일을 강조합니다. “길을 내고, 거치는 것이 없게 하라.”라는 말씀은 회개, 마음의 낮아짐, 우상 제거, 공동체 내 회복을 위한 내외적인 삶의 태도 변화를 요청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할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경험할 하나님의 회복은 자동 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길을 내고 거치는 것을 제거하는 거룩함의 회복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15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나,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다.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회개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준다. 16 나는 사람들과 끝없이 다투지만은 않는다. 한없이 분을 품지도 않는다. 사람에게 생명을 준 것이 나인데, 내가 그들과 끝없이 다투고 한없이 분을 품고 있으면, 사람이 어찌 견디겠느냐?”

끊임없이 겸손하기 위해 노력하는 성도, 자신을 성찰하며 회개하는 성도를 하나님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끝없이 다투지도, 한없이 분을 품지도 않는 하나님은 우리의 적은 노력에도 못 이기는 척 다시 동행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인내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듯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탐욕스러운 죄’입니다.

“17 사람의 탐욕스러운 죄 때문에 내가 노하여 그들을 쳤고, 내가 노하여 나의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그들은 끝내 나를 거역하고 제 마음에 내키는 길로 가버렸다.”

여기서 탐욕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 ‘베짜(בֶּצַע, betsa)’는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남의 것을 빼앗아 부당하게 가지려는 마음, 정의롭지 않은 이익에 대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단지 ‘갖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해치는 방식으로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이 마음은 자기 유익을 위해 관계와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근본적인 자기중심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런 자기중심성, 욕망, 탐욕스러운 죄로 인해 지도자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에 말씀드린 불순종의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과 교회가 추구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은 ‘자기중심성’인 이 ‘탐욕스러운 죄’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타인을 돕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순수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서고 싶어 하는 숨겨진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본문에 나오는 “제 마음에 내키는 길”, 즉 하나님보다 자신의 욕망과 목적대로 살아가려는 방향과 일치하게 됩니다.

왜 사람은 영향력을 가지려 합니까? 영향력이 있으면 인정받을 것 같고, 영향력이 있으면 안전할 것 같고, 영향력이 있으면 삶이 보장될 것 같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 영향력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탐욕과 자기중심성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골라 앉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누구에게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아라. 혹시 손님 가운데서 너보다 더 귀한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너와 그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이 분에게 자리를 내드리시오’ 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8-9절)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단순한 예절 교육이 아닙니다. 이들의 마음에 깊숙이 자리한 ‘기득권과 권력욕’을 폭로하시는 말씀입니다. 영향력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은 늘 ‘중요한 자리에 가까이 앉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시며, 그럴 때 주인이 우리를 높여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는 더 구체적으로 교회가 이 죄에 빠져 있는 모습을 지적합니다. 야고보서 2:1-9에서 교회 안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부자에게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라고 말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으십시오.”라고 말하는 태도를 ‘악한 판단’이자 ‘탐욕스러운 죄’라고 단호하게 비판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만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최근 우리는 사회를 뒤흔들었던 여러 부정부패 사건을 보았습니다. 최고 권력의 자리에 있는 전 대통령과 부인의 이름이 거론되는 여러 의혹, 즉 부정한 청탁, 뇌물 수수, 사적 이익을 위한 권력 남용 등의 문제들이 끊이지 않고 드러나는 중입니다.

이 사건들을 보며 우리는 이사야서와 예수님 그리고 야고보서가 경고한 ‘탐욕스러운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됩니다. 자기중심적인 마음, 이런 영향력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작동할 때, 공정과 정의는 무너지고 공동체 전체가 병들게 됩니다. 이 모든 탐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삶을 황폐하게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진정한 영향력의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탐욕스러운 죄 때문에 ‘얼굴을 가리셨다.’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영향력은 언제나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와야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내가 영향력을 행사해야지.’, ‘내가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을 통해 영향력을 드러내시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도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과 길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들으라”, “가라”, “전하라”, “돌아오라”와 같은 순종의 초대를 합니다.

모세는 스스로를 말 못하는 자라고 낮추었을 때 하나님께 쓰임 받았고, 예레미야는 어린아이라며 주저했을 때 선지자로 부름받았고,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을 때 복음의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영향력을 추구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며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창립 13주년 기념 감사 주일로 모였습니다. 감사 예배로 드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기억하기 위함입니까? 단순히 교회의 성장과 외적 성공을 축하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늘 추구하고자 하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다시금 되새기기 위해 우리는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거룩한 백성들, 성도들로 이루어집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상에서 겸손하게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늘의 예배’에서 묵상하고 있는 스가랴서를 보면, 돌아온 귀환 공동체에게 하나님이 진정 원하신 것은 그들의 삶에서 정의와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부와 권력과 안전한 공간을 꾸미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종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성벽도 성전도 안전도 복도 제공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귀환 공동체의 안전과 회복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우리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라고 착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장 위험한 생각입니다.

“18 사람의 소행이 어떠한지, 내가 보아서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고쳐 주겠다. 그들을 인도하여 주며, 도와주겠다.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19 이제 내가 말로 평화를 창조한다. 먼 곳에 있는 사람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에게 평화, 평화가 있어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내가 너를 고쳐 주마.” 사람에게 또 성도에게 깊이 박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고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권력 다툼을 했지만,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어라’라고 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고쳐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탐욕을 드러내실 뿐 아니라, 그것을 새롭게 고쳐내십니다.

하나님이 고치셔서 성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안내하실 줄 믿습니다.

이런 은혜는 “땅을 돋우고 돋우어서 길을 내어라. 나의 백성이 걷는 길에 거치는 것이 없게 하여라.”(14절) 라는 말씀에 겸손하게 순종할 때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탐욕스러운 죄’인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영향력을 내가 행사하려고 하는 죄를 떨쳐내고, ‘겸손’이라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성도는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겸손하게 성도다운 삶을 살 때 하나님이 내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영향력을 행사하실 뿐입니다.

영향력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할 때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우리가 영향력을 가지려고 할 때 하나님은 얼굴을 가리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낮아지고, 가난한 이들을 향해 환대와 섬김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영향력을 쫓는 대신, 겸손하게 서로를 섬기며, 가난한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는 교회가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에 참된 평화와 선한 영향력을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로 향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실 수 있도록 길을 내고, 닦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